편지


                 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

유한함을 알기에 더 소중해진 하루
지는 꽃 잎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서둔다.


옥석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흔한가?
수시로 색이 변하는 저 나무며 숲이며
잃어버리고,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오면
그리하면 되는 것.


행여 시들까 염려하는 지금
근심하며 보내버리는 시간
아껴야 해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꽃 잎
딱 한 잎만
사랑이라 믿고
책장 사이 넣어두자.
오늘은 그리하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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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

'니'가 있어야
'너'도 있고
'나'도 있다.

'네'게로 갈 길도 가깝지 않지만
'내'게로 향하는 길도 아직 멀다.


그렇다면,
이기적으로 살기 보다
좀 이타적으로 사는 게
삶의 진리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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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답장


                        길상호


이사를 하고 나서야 답장을 씁니다
늦은 새벽 어두운 골목을 돌아 닿곤 하던 집
내 발자국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어
바람 소리로 뒤척이던 나이 많은 감나무,
지난 가을 당신 계절에 붉게 물든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마루에 올려 놓곤 했지요
그 편지 봉하기 위해 버려야 했던 잎들은
모아 태워도 마당 가득 또 쌓여 있었습니다
나 그 마음도 모르고 편지 받아 읽는 밤이면
점점 눈멀어 점자를 읽듯 무딘 손끝으로
잎맥을 따라가곤 했지요 그러면 거기
내가 걸었던 길보다 더 많은 길 숨겨져 있어
무거운 생각을 지고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당신, 끝자리마다 환한 등불을 매달기 위해
답답한 마음으로 손을 뻗던 가지와
암벽에 막혀 울던 뿌리의 길도 보였습니다
외풍과 함께 잠들기 시작한 늦가을 그 편지는
제 속의 불길을 꺼내 언 몸을 녹이고
아침마다 빛이 바래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
폭설이 많았던 겨울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는 길가 마늘밭에서
지푸라기 사이로 고개 내민 싹들을 보았습니다
올해는 누가 당신의 편지 받아 볼는지
나는 이제 또 다른 가지를 타고 이곳에 와서
당신이 보냈던 편지 다시 떠올립니다
.........................................................................................


든든히 버텨줄 믿을만한 기둥도 못 되고,
곤한 다리 잠깐 쉴 의자도 못 되고,
잠시 서서 기대어 볼 전봇대만도 못한,
남편...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네게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산다.


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네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정다운 편지 한 줄 전하지 못하고 산다.


그래도, 네가 있어 내가 산다.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오랜만에 편지를 쓰려니,

하고 싶은 말 너무 많은데

차마 다 잇지 못하고,

결국 할 말 조차 모두 잊고는

또 접게 된다...

그리움을 적어 보내기에는

아직 내 마음이 너무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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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 지

 

                        서정윤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쓴다.
먼 하늘 노을지는
그 위에다가
그간 안녕이라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을
먼저 하자.

 

그대와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아련한 노을 함께 보기에 고맙다.
바람보다,
구름보다 더 빨리 가는
내 마음, 늘 그대 곁에 있다.

 

그래도 보고 싶다는 말보다
언제나 남아 있다는 말로
맺는다

......................................

 

커피 한 모금에

햇살 한 줌 건내주는,

보잘 것 없는 한 줄 글귀에

수정같은 미소 건내주는

아름다운 사람아...

 

고맙다. 이 편지를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 곁에 있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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