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을 두 번 우리다


                              심재휘


녹차 잎을 우려내는 동안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작은 봄 잎 같고
잎에 떨어지는 빗물 같은 여자
둥굴게 말려있던 그녀가 꼭 쥔
주먹을 펴 나에게 내밀자
내 손은 어느새 늙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을 해는 금방 남루해졌습니다


차 한 모금 마시는 사이에도
순식간에 저무는 것들


나는 따뜻한 물로 식어버린 찻잎을
한 번 더 우립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찻잎들이 잠시 일었다가 가라앉는 사이
내 사랑은 한없이 엷어졌습니다 어느덧
물 같은 당신에게 갇혀버렸습니다
..................................................................


사람의 인연이란 게
늘 그렇지 뭐
다시 안 보면 그 뿐이고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시간도 그렇고...


하지만
그 인연이
그 시간이 쌓여서
내 삶이 되는데


언젠가, 어느 순간에
우리도 다시 만날 일이 없을 때가 오겠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때까진 우리 잘 지내자


웃으면서 서로 반겨 맞아주고
따뜻한 손 맞잡고
시린 등 다독여주고
진심 어린 칭찬의 말 건내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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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씌여진 시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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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저녁


                         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저녁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는 이야기를


발들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들꽃
햇볕에 그을린 시골 동창생의 사투리
당숙모가 차리는 시골 밥상


나물 뜯던 언덕에 핀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을 향해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저녁
...............................................................................................

지난 48년간 내 자랑이던 멋쟁이 교장선생님, 큰 삼촌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건장한 체격의 자상한 미소를 띈 중년의 신사는 간 곳없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당신의 몸에 그 간의 병고의 고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가녀린 뼈마디만 남은 손으로 전해지는 냉기 도는 체온도 차츰 식어가고,

흐릿하게 남았던 호흡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삼촌은 그렇게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삼촌이 그렇게 떠날 준비를 하던 수시간동안,

세 딸들은 서러움을 참으며 삼촌에 매달려 기도를 올린다.
조금만 더 같이 있자고.

아버지의 딸이라 너무 감사하고 다시 당신의 딸로 태어나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도 내 죽음 앞에 저런 간절한 기도를 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그녀들의 기도는 그렇게 간절했고 진실했으며 정성스러웠다.


삼촌의 사후 장례 절차를 논의하고 진행하는 사촌들의 모습에서

당신의 삶은 참으로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성실하고 정성스럽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행하는 모습에서

당신의 삶이 신의 뜻에 부합하였음을 보았다.


'삼촌, 당신은 제 자랑이셨으며 제 삶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부디 고통 없고 고뇌 없는 세상에 가셔서 평안하고 안락하게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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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시


               윤성학


로마 병사들은 소금 월급을 받았다
소금을 얻기 위해 한 달을 싸웠고
소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나는 소금 병정
한 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다
소금 방패를 들고
거친 소금밭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소금기를 더 잘 씻어 내기 위해
한 달을 절어 있었다


울지 마라
눈물이 너의 몸을 녹일 것이니
.............................................................................................

몇 주동안 주말까지 이어진 강행군(?)에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다.
옆에서 운전하던 동료가 말을 건낸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아주 피곤하다고, 요즘 들어 주말에 쉬질 못해서 더 그런 것같다고 했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거 아녜요.'
그 말 한마디가 뒤통수를 딱 친다.
누가 알아주길 바란 적 없는데 그 한마디에 가슴이 시리다.
바람 새는 풍선 인형마냥 맥이 탁 풀린다.
바람이 다 빠져서 바닥에 늘어진 기분이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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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비


               문태준


나무그늘과 나무그늘
비탈과 비탈
옥수수밭과 옥수수밭
사이를
뛰는 비
너럭바위와 흐르는 시내
두 갈래의 갈림길
그 사이
하얀 얼굴 위에
뿌리는 비
열꽃처럼 돋아오는 비
이쪽
저편에
아픈 혼의 흙냄새
아픈 혼의 풀냄새


소낙비 젖어 후줄근한 고양이 어슬렁대며 산에 가네
이불 들고 다니는 행려처럼 여름 낮은 가네
...................................................................................


벼르고 벼르던 소낙비가 악다구니쓰듯 쏟아졌다.
소낙비는 그 방울만큼이나 두터운 소리를 내며 둔탁하게 쏟아졌다.
후두두두둑 후두두두둑
후두두두 후두두두
쏴아 쏴아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던 빗줄기는
이내 사그라든다
호독 호독
뚜욱 뚜욱
뚝!
참, 쉽게도 간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함부로 거짓을 떠벌이고,
성을 내고, 미워하고, 악다구니를 쓰고,
업을 짓고, 죄를 쌓고...


이 생과의 이별이 바로
이 순간일 수 있음을 알기나 할까?


참, 쉽게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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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소녀


                      박후기


나는 아르바이트 소녀,
24시 편의점에서
열아홉 살 밤낮을 살지요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면 좋겠지만
굳이 앞날을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바코드로 찍혀 있는,
바꿀 수 없는 앞날인 걸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광장의 팬지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지요
화장만 고치고 나오지요


애인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우린 컵라면 같은 연애를 하지요
가슴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삼 분이면 끝나거든요

 
가끔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엄마 아빠도 힘들게
엄마 아빠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
아르바이트는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어요
................................................


슬퍼하지 마라

아파하지 마라


네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열심히 하면 모두 다 잘 될 거라는 

잡소리도 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선배인냥 하는 내가

네게 이 말 밖에 못하는 게 

슬프고 또

아프다.


그래도

슬퍼하지 마라.

아파하지 마라.


우리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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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송수권


어느날 세상은 비에 얼룩지고
내 마음 서러운 날은 풀밭을 찾아갔다
뿌옇게 흐르는 안개비를 옷소매로 닦으며
짓무른 황토흙을 지쳐 나가 풀밭을 걸었다
구둣발 밑에서 깨어지는 풀들의 비명,
어떤 풀꽃들은 안개속에서 팔굽이를 들어 필사적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무심히 고개를 돌렸을 때 등뒤로 거대하게 찍혀진 발자국들
황토흙 발자국들, 흐르는 옷소매로 나도 몇 번이나 얼굴을 지웠다
풀들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


큰 바람이 쓸고 간 자리
군데군데 들 풀이 드러눕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며 잎사귀며
아직 덜 자란 열매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마음마저 어수선하다.


큰 바람이 지나간 자리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깊어
어디든 훌쩍 떠나기를 재촉하고
마음 둘 곳 없던 나는
자꾸만

큰 바람이 지나간 자리로
눈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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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살던 집


                               권대웅


길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햇빛에 꽃잎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기억날 때가 있다


어딘가 두고 온 생이 있다는 것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어떡하지 그만 깜빡 잊고
여기서 이렇게 올망졸망
나팔꽃 씨앗 아이들 낳아버렸는데
갈 수 없는 당신 집 와락 생각날 때가 있다


햇빛에 눈부셔 자꾸만 눈물이 날 때
갑자기 뒤돌아보고 싶어질 때
노을이 붕붕 울어댈 때
순간, 불현듯, 화들짝,
지금 이 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기억과 공간의 갈피가 접혔다 펴지는 순간
그 속에 살던 썰물 같은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순간
..........................................................................


돼지풀에 손등을 쓸렸다.
벌겋게 쓸린 자국이 남았고
따갑고 쓰리다.
바삐 연고를 찾다가 문득...


뙤약볕 아래 밭일하던 엄마
옥수수가 먹고 싶다고 보채는
철없는 아이의 성화에
웃자란 돼지풀을 써억 썩 맨손으로 걷어내고는
잘 익은 놈으로 골라 뚜욱 뚝 따내던...


급한 마음에
밭둑 가로질러 돼지풀 덤불을 헤치고 온
옥수수 한 바구니의 호된 쓰라림
물 한바가지로 씻어 달래고
씩씩하게 옥수수 삶으러 간다.


내 새끼 먹일 옥수수 한 바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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