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하나 등불 하나


                                     윤후명


어두운 마음에 등불 하나
헤매는 마음에 등불 하나
멀리 멀리 떠난 마음에 등불 하나
할퀴어진 마음에 등불 하나
찢어진 마음에 등불 하나
무너진 마음에 등불 하나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도 있다
어느 마음속에도
하늘 있고
땅 있고
찰나와 영겁 닿는 빛 있음을
등불 걸어 밝히어라
보이지 않는 마음도 밝혀
그 애끓는 사랑 하나 환하게 환하게
뭇 별까지 사뭇 밝히어라
................................................................................

사람의 인연이란 게 있긴 있는 것 같아...
점점 새롭게 만나는 건 어려워지고 헤어지긴 너무 쉬워지지.
사소한 오해나 다툼으로도 영영 이별하지.
그냥 그런 게 나이 먹으면서 바뀌어 가는 것인 듯.
새롭게 뭘 하는 게 어려워.
주변 여건도 따져봐야 하고...
아무튼 좋은 사람들 좋은 인연으로 만나 유지하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애 써야 하는데
그것도 내 마음 같지는 않지.
그렇다고 아주 많이 신경 쓸 일은 물론 아니지만...
어쨌든 새로운 만남 보단 이별이 잦아지겠지.
좋은 사람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좋게 유지한다는 건
수고로운 일이겠지.
쉽지마는 않은 일 일거야.

사랑하면 다 되겠지만...
사랑 하나면 다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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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불꽃,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

동네에서 말썽쟁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땜통 억만이는

곤지암 계곡에서 물을 많이 마시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중동에 밤 일을 나가야만 했던 수남 엄마는

만취해서 돌아온 어느 새벽녘

연탄가스를 잔뜩 마시고 누워있던

수남이를 영영 깨우지 못했다.

왼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있던 호룡이 삼촌은

늘 호룡이를 때렸다.

비바람이 무척 불어 닥치던 어느 날

마당 한 가득 피가 흥건했던 그 날,

이후로 호룡이도 호룡이 삼촌도 다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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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연가


                            이해인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다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서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

타고 난 생이 달라
가까이 할 수 없음을


행여 그 모습이라도 볼까 하여
향기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담벼락에 매달려 오르고 또 오르고


겨우 담 하나 넘는데 한 생을 다 보내고
꽃이라도 피었거늘


꿈에라도 찾던 이가
영영 가고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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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들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

노래를 불러보려 기타를 안는다.
몇 개의 노래 제목과 몇 마디의 멜로디가
바람결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지판 위에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댄다.
기다린다.


글을 써 보려 연필을 든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무수한 단어들과 심상의 조각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머릿속에
뒤죽박죽 뒤섞여있다.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흰 종이 위에 연필심을 댄다.


시작하기 전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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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


아카시아들 일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때 이른 오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아카시아가 한동안 위세를 떨고
이팝나무 산딸나무가 꽃을 주렁주렁 매달았더랬다.


아침에 보니 장미가 가득 핀 자리에
흰 꽃 잎만 몇 장 남기고
오월이 훌쩍 가버렸더라.


유월의 첫 날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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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신용목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키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었다
............................................................................................................................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니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닷물에 수장된 수백명의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이,
이 땅의 어른임이 너무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한동안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고개 숙여 다시 그들의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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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한하운


무지개가 섰다.
무지개가 섰다.


물 젖은 하늘에
거센 햇살의 프리즘 광선 굴절로
천연은 태고의 영광 그대로
영롱한 칠채(七彩)의 극광으로
하늘과 하늘에 궁륭(穹륭)한 다리가 놓여졌다.


무지개는 이윽고 사라졌다
아쉽게
인간의 영혼의 그리움이
행복을 손모아 하늘에 비는 아쉬움처럼
사라진다 서서히......


만사는
무지개가 섰다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었다.
........................................................................

꽃보다 아름다운 생명들이
지금
꽃처럼 지려는가?


눈물마저 모두 거두어
마른 탄식만 남기고
그렇게 돌아가려는가?


부모 형제도
친구들도
수많은 이들의 기도도
모두 남겨 두고
그렇게 떠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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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

유한함을 알기에 더 소중해진 하루
지는 꽃 잎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서둔다.


옥석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흔한가?
수시로 색이 변하는 저 나무며 숲이며
잃어버리고,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오면
그리하면 되는 것.


행여 시들까 염려하는 지금
근심하며 보내버리는 시간
아껴야 해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꽃 잎
딱 한 잎만
사랑이라 믿고
책장 사이 넣어두자.
오늘은 그리하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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