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이규리
 

세상에서 가장
긴 자가 수평선을 그었으리라
허리나 목을 백만 번 감아도
탱 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푸른 현


내 눈에도 수평선이 그어졌다
바다를 떠나와서도 자꾸 세상을 이등분하는,
저 높낮이와 명암들


수평선 건져내어 옥상에 걸면
오래 젖어온 생각도 말릴 수 있겠다
.....................................................

첫 눈 살짝 내린
하늘을 누가
설렁설렁 쓸어놨을까?


빗살 비낀 모양으로 한껏 멋을 낸
하늘 위로
공연(空然)한 두근거림
옅푸른 가벼움
사늘한 그리움
민들레 씨앗 흩어지듯
폴폴폴 날린다.


오래 담아뒀던 생각
이제 살살 쓸어내야겠다.

외딴 산 등불 하나

                                  손택수


저 깊은 산속에 누가 혼자 들었나
밤이면 어김없이 불이 켜진다
불을 켜고 잠들지 못하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외눈으로
하염없이 글썽이는 산,


그 옆에 가서 가만히 등불 하나를 내걸고
감고 있는 산의 한쪽 눈을 마저 떠주고 싶다
..........................................................................

가을이 깊어가는 것은


점점 푸르름을 더하는 하늘의 깊이로
낙엽 흩어져 구르는 소리로
가을비의 시린 감촉으로
비어가는 나뭇가지의 헐벗음으로
가슴 한 구석 묻어두었던 그리움의 발효로
느낄 수 있다.


스러져 누울 때까지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
그저 가벼이 보내려 애 씀을
삶이라 해야겠지.


단 한번 마주치지 못하는 생의 엇갈림.
이 가을... 저 강변 어딘가에서,
아니 저 산모퉁이를 돌면,
생전 마주치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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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 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 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 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 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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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난 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기 바라지 않는다.
내 마음을 담은 노래를
단 한 사람이라도 가슴으로 듣기를 바란다.


난 여러 사람이 내 말에 귀 기울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간절한 기도를
단 한 사람이라도 함께 하기를 바란다.


난 누구에게나 사랑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눈 감는 순간,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곁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다.


사경을 넘나들며 처음으로 나를 불렀던 아버지였다.
그것조차 훗날 전해들은 얘기다.
결국 내가 피했고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
당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길일 것이라고 내 스스로 위안했다.
다시 마주칠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먹서먹했던 이별도
스무 해가 지난 바로 오늘,


아버지가 눈물 나게 보고 싶었다.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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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위하여

                            안도현


그대를 만난 엊그제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 쓸쓸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던 까닭은
세상에 지은 죄가 많은 탓입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죄는
잊어버릴수록 깊이 스며들고
떠올릴수록 멀어져 간다는 것을
그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내가 가진 것 중
숨길 것은 영원히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여
아픈 가슴을 겪지 못한 사람은
아픈 세상을 어루만질 수 없음을 배웠기에
내 가진 부끄러움도 슬픔도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그리움의 한 두 배쯤
마음 속에 바람이 불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대를 위하여
내가 주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내내 행복하였습니다
...........................................................

내 마음을 알아주기 바란 적 없고
빈 가슴 한 구석 채워주기 기대한 적 없고
부족한 지혜를 구한 적 없고
가슴의 상처를 부끄러워 한 적 없다.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했으므로


하늘을 보기를 바라고
귀 기울이기를 바라고
노래하기를 바라고
함께 걷기를 바라고
곁에 있기를 바라던 것


바라는 것은 모두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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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있다 ..
...............................................................................

우리 삶을 어떤 목적 위에 두는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어쨌든 한 사람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여 준비하고,

온 힘을 쏟아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19살의 어린 소녀가 자신의 꿈인 프로파이터가 되기 위해 피땀을 쏟고,

지쳐 쓰러진 몸을 겨우 일으켜 다시 상대와 맞서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가슴 뭉클하기도 했다.
결국 데뷔전을 멋지게 승리했다.

자신과 싸워 이긴 것이다.
반면 패배한 선수는 폭품 눈물을 쏟아냈다.
경기에 진 것이 억울하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못해보고 졌다는 자괴감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곧 울음을 멈추고 다음에는 꼭 더 열심히 운동해서 멋진 경기를 보이겠다고 다짐한다.

 

반드시 목표를 이루고 싶다면
결코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면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넌 지금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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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

생때같은 자식을 바다에 묻고
40여일을 굶다가 쓰러진
한 아비의 맥없는 눈물을 보고 있으려니
무기력하기만한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다.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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