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물점 여자

                        홍정순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이 필요하듯
여자에겐 시간이 절실하다
시를 쓰겠다고 한 시간 일찍 나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고요 속 새벽이 받아들인다
뒤란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흙집을 개조한 철물점 기와지붕엔
아직도 이끼가 끼어 있어
늘 기역자로 만나야 하는 새 소리는
어긋나 포개진 기왓장 틈새에
알 낳고 품었을 시간들
지난 십 년을 생각나게 하는데
용마루 위 일가(一家) 이룬
새들의 울음소리에
자꾸만 착해지는 여자
지명 따라 지은 이름 '대강철물점'
간판 너머엔
적당히 보리밭 흔드는 바람이 불고
멋대로 떨어지는 감꽃도 싱싱하지만
개줄 하나 팔고 앉으면
받침 하나 빠지고
물통 하나 팔고 앉으면
단어 하나 달아난다
오늘도
철물처럼 무거운 시
플라스틱 약수통처럼 가볍고 싶은 시
........................................................................................

제 앞 섶을 잘 매조지하는 일.
일상의 매 순간에 최선을 다 한다는 거창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은 삶의 단계 마다 잘 매듭을 짓고
순간 순간 완성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면
그때마다 단추를 딱! 잘 채워서
우선 제 꼴을 단정히 잡아놓을 일이다.

그게 우리가 알 수 있는 삶의 몇 안 되는 답을 찾는 길이다.

빗소리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

마른 장마 끝의 더위는 대단했다
날이 저물어도 한낮의 열기가 대기를 지배했고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늘어갔다.


훌쩍 어딘 가로 떠나고 싶기도 했다.
대단한 것을 얻을 것도
딱히 잃어버릴 것도 없는 일상
그리고 보잘 것 없던 하루...


무더위에 지쳐 잠시 일상의 감사를 잃어버린
그 날 밤,
갑자기 천둥번개로 사방이 진동하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간 위의 집


                              김진경


기차는 이 간이역에서 서지 않는다
오직 지나쳐지기 위해 서 있는 낡은 역사
무언가 우리의 생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표시
시간 위의 집
.................................................................................... 
제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고
늘 자신하던 내가
하루에 휴대전화를 두 번이나 잃어버렸다.
더구나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나더라는...


어렵사리 새벽녘에 다시 되돌아 온
낡은 휴대폰처럼
이제 기억조차 낡아 가는
이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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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 바라보며

   - 어머니 생각


                                     정완영


분단장도 모른 꽃이, 몸단장도 모른 꽃이
한 여름 내도록을 뙤약볕에 타던 꽃이
이 세상 젤 큰 열매 물려주고 갔습니다.
..........................................................................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지인

주인 나간 집 지키는 강아지마냥

담벼락에 바싹 붙어 쭈그리고 앉아있다.

 

애 쓰셨다고 인사말을 건내자

담배 연기를 흔적도 없이 다 마신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연기가 들어갔나 싶을만큼

입으로 코로 토하듯 연기를 뿜어내며 맥 없이 혼잣말을 한다.

'아침에 전화할 일이 없어. 너무 허전하더라'

 

오랫동안 아들도 못 알아보고 누워만 계셨건만

살아 계실 때는 이렇게 보고 싶을 줄은 미처 몰랐다며

푸른 담배연기를 뿜어올리며 하늘을 쳐다본다.

낚싯대 던지듯 아주 멀리 멀리 시선을 던진다

 

근방에서는 소문난 효자였던 그이건만

어머니 가시는 길을 막아 설 수는 없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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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명시 중의 명시...

 

도회지에서의 어린 시절의
낡은 기억들은
뜨겁거나 혹은 아주 차갑거나
답답하거나 또는 칙칙한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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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오탁번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부채질 하며
말복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달려오던 빨간색 자동차가 끽 멈춰 섰다
운전석 차창이 쑥 열리더니
마흔 살 될까말까 한 아줌마가
고개도 까닥하지 않고
-할아버지! 진소천 가는 길이 어디죠?
꼬나보며 묻는다
부채를 탁 접으면서 나는 말했다
- 쭉 내려가면 돼요, 할머니!
내 말을 듣고는
앗, 뜨거!놀란 듯
자동차가 달아났다
 

우리나라에는
단군할아버지 말고는
'할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유관순 누나 생각하면
나는 어린이집에도 아직 못간
앱솔루트 분유 먹는
절대적인 갓난애야!
'할아버지'라니?
고얀 년 같으니라구!
..............................................................

말로 독침을 쏘는 것들

 

말벌보다 독한 침이 머릿속에 박혀
뺄 엄두는 못 내고
맹독이 자꾸만 온 머리로 퍼져
편두통과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내 입에 똥칠하기 싫어
각각 좌우측 침샘에
말끔히 묻어뒀던 쌍 욕이 스며 나오고
안면 근육 경련에 동반하여
쌍 주먹으로 이어진 인대가 발작한다.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쌍 주먹을 날린 후
쌍 욕 더미에 파묻어 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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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박성우


옹알옹알 붙은 감꽃들 좀 봐라
니가 태어난 기념으로 이 감나무를 심었단다
그새, 가을이 기다려지지 않니?
저도 그래요, 아빠

 
웬, 약주를 하셨어요? 아버지
비켜라 이놈아,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담장 위로 톱질당한 감나무, 이파리엔 햇살이
파리떼처럼 덕지덕지 붙어 흔들렸다
몸에 베인 뒤에야 제 나이 드러낸 감나무
나이테 또박또박 세고 또 세어도
더 이상의 열매는 맺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안에서
나는 그렇게 베어졌다

 
그해, 장마는 길었다
톱으로 자를 수 없는 것은 뿌리였을까
밑동 잘린 감나무처럼 나도
주먹비에 헛가지를 마구 키웠다
연하디연한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쉽게 몸살을 앓는 자식이 되기도 했지만
끝내 중심은 서지 않았다
이듬해 우리는 도시로 터를 옮겼다

 
아버지는 지난 겨울에 흙집으로 들어가셨다
사람들은 가장 큰 안식을 얻었다고 했다

 
왜 찾아왔을까
상추밭이 되어버린 집터
검게 그을린 구들장 몇 개만 햇볕에 데워져 있다
세상 겉돌던 나무 한그루
잘려진 밑동으로
감꽃이 피려는지 곁가지가 간지럽다
.....................................................................

하늘로 이어진 끈이 있대
아니라고 해도 싫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는...


내 아비가 되고
내 자식이 되는
흔히 천륜이라고 부르는
차마 어쩔 수 없는...


얼마든 잘 살 수 있대
하늘로 이어진 끈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가 올 수는 없었겠지만
한 때는 차라리 그게 좋다고 생각했던...


모래성마냥 자꾸만 무너져 내리던
끈이라도 붙들고 싶던
하루 하루가 유난히 아프던...


어지간히 뜨겁고 푸르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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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

내 마음이 다만 괴로울 뿐이었다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이 있고
비바람 몰아치다
말짱하게 갠다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이
모래성마냥 무너져


단지 내 마음이 괴로울 뿐이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다 뒤섞여 흠뻑 젖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오늘따라 자꾸만 마음이
모래성마냥 무너져


내 마음이 다만 괴로울 뿐이었다
사는 게 좋으냐?
그렇다면 툭툭 털고 살 일이라고
부지런히 땀 흘리며 살 일이라고
자꾸만 혼자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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