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 그 러 바 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오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싶다.
....................................................................

흩날리는 꽃잎보다 가벼운 말
마음대로 덧칠하고 허공에 날려버리는...
젊은 날, 그렇게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외출은
내가 보았던 가장 화려했던 꽃잎 흩날리던 날
꽃잎보다 가벼이 흩어졌지.
다시 마주칠 일 없을 거라는
낡은 꽃잎 같은 너의 말을
아주 오래 오래 낡은 시집에 넣어두었지.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수인... 예당기행   (0) 2015.06.08
김광균... 데셍  (0) 2015.06.04
박성우... 물의 베개  (0) 2015.06.04
황규관... 길  (0) 2015.05.18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0) 2015.05.14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싱그런 바람의 노랫소리.
언제나 그렇게 있었던 바람의 노래가 새롭게 들리는 아침은 분명 축복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늘 그렇게 있었음에도 알지 못했던 이유는
내 눈을 뜨지 못했고, 내 귀를 열지 못했고, 내 마음을 쓰지 못했던 것.
앎은 그렇게 온다.
눈을 떠서 바라보고, 귀를 기울이고, 내가 마음을 써야 온다.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그걸 알게 되는 기쁨은 꽤 쏠쏠하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균... 데셍  (0) 2015.06.04
김선우... 봄날 오후  (0) 2015.06.04
황규관... 길  (0) 2015.05.18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0) 2015.05.14
서종택... 풀   (0) 2015.05.07


출처 : 추억의 7080 통기타 음악 "space"
글쓴이 : 추억의 7080 통기타 음악 원글보기
메모 : 15년만에 쓴 110번째 곡 '지붕 낮은 집'


                        황규관


가자고 간 건 아니었지만
간 자리마다 허무 가득한 심연이다


떠나고자 떠난 건 아니었지만
두고 온 자리마다 가시덤불 무성한 통곡이다


지금껏 품은 뜻은 내 것이 아니었고
꾸었던 꿈도 내 소유가 아니었는데


지나온 길 위에 남긴 흔적에
왜 가슴은 식을 줄 모르는가


멈추자 해도 가야 하고
머물자 해도 떠나야 하는데


왜 설렘이고 번민인가
바람이고 생명인가
......................................

 

푸른 하늘 빛과 물 빛이
맞닿은 곳
연초록빛 들판에
형형색색 들꽃이 번져
생과 사의 경계조차 모호한 곳

이름 모를 바람이 들판을 휘휘 돌아
푸른 물길로 눈 맞아 달아나고
여전히 군데 군데
풀 누운 자리
꽃 진 자리 남았다.

가슴 속의 푸르름은 변함이 없건만
눈뜨고 보니 나는 꽤 먼 곳까지 와 있다.
말로 풀기에도
글로 쓰기에도 너무
길고 긴 사연을 언제 다 얘기할까?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선우... 봄날 오후  (0) 2015.06.04
박성우... 물의 베개  (0) 2015.06.04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0) 2015.05.14
서종택... 풀   (0) 2015.05.07
도종환... 화인(火印)  (0) 2015.05.07

오래된 여행가방


                                  김수영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봄 햇살 따스한 날
부실한 다리도 쉬고, 눅눅한 기분도 말릴 겸,
길게 누운 나무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꽃은 잠깐 폈다, 밤 사이
하염없는 봄비에, 심술궂은 봄바람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봄 볕의 따스함이야
겨우내 떨어봤으니 잘 알 터.


봄 기운에 나른해진 몸,
아쉬움을 보태 묵직해진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반 접어올린 소맷자락에
찰싹 달라붙었던 꽃잎 한 장.
포르르르...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성우... 물의 베개  (0) 2015.06.04
황규관... 길  (0) 2015.05.18
서종택... 풀   (0) 2015.05.07
도종환... 화인(火印)  (0) 2015.05.07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0) 2015.04.07


                      서종택


평생 한 번도
바람에 거슬러 본 적 없었다
발목이 흙에 붙잡혀
한 발자국도 옮겨보지 못했다
눈이 낮아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했다
발바닥 밑 세상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었으므로
참, 모질게도, 나는 살았다.
.............................................................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는
말 한마디가 가슴을 쾅 치고 지나가더니
종일토록 눈물이 멎을 줄 모른다.


슬픔은
하얀 꽃잎 가득 날리던 자리에도
푸른 바람 따라
연초록이 가득 번진 산등성에도
노을 붉은 해질녘 언저리에도 있었다.


푸른 눈물로 씻고 또 씻고
붉은 산등성이 너머
하얀 바람이 불어도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꽃 진 자리엔
또 초록이 나고
또 초록이 나고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규관... 길  (0) 2015.05.18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0) 2015.05.14
도종환... 화인(火印)  (0) 2015.05.07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0) 2015.04.07
문태준... 가재미   (0) 2015.04.03

화인(火印)


                            도종환


비올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火印)처럼 찍혀 평생 남아 있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

미안하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오늘.

하루 종일 등짝이 아팠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0) 2015.05.14
서종택... 풀   (0) 2015.05.07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0) 2015.04.07
문태준... 가재미   (0) 2015.04.03
강미정... 거미줄   (0) 2015.04.02


출처 : 추억의 7080 통기타 음악 "space"
글쓴이 : 추억의 7080 통기타 음악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