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필


               이상국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잘 쓰고 가는 것이 인생이겠다.


몸도 잘 쓰고
마음도 잘 쓰고
머리도 잘 쓰고
시간도 잘 쓰고
돈도 잘 쓰고


선하게 의롭게 이롭게
잘 쓰고 가는 것이 인생이겠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주대... 형편대로  (0) 2014.02.19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0) 2014.02.17
김종길... 고갯길  (0) 2014.02.12
이상국... 나의 노래   (0) 2014.02.10
이병률... 생의 절반  (0) 2014.02.07

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이상국


봉평에서 국수를 먹는다
삐걱이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그릇에 천원짜리 국수를 먹는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면발에
우리나라 가을 햇살처럼 매운 고추
숭숭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넣고
오가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국수를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
또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국수 마는 아주머니의 가락지처럼 터진 손가락과
헐렁한 티셔츠 안에서 출렁이는 젖통을 보며
먹어도 배고픈 국수를 먹는다
왁자지껄 만났다 흩어지는 바람과
흙 묻은 안부를 말아 국수를 먹는다
.......................................................................

어디론가 떠나는 길,
그 길 위, 일상의 풍경이 새롭게 혹은 낯설게
다가서고 또 지나간다


하지만 무심코 지나던 길 위에선
내 그림자를 만나는 일도 흔치않다.


용기는 바닥에 붙은 발바닥을 한걸음 떼는 일이라던데,
이 자잘한 용기조차 호기롭게 부려보지 못했다.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
꼭 한 뼘씩의 여유로움을 선사하며 멀어진다.


사뿐히 차 창문을 내리고
손을 뻗어 가볍게 인사를 건낸다.
잠깐 다녀오마 하고...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랑... 망각  (0) 2012.11.21
나희덕... 벗어놓은 스타킹  (0) 2012.11.15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0) 2012.11.02
오규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0) 2012.11.01
이해인... 가을 편지  (0) 2012.10.31

집은 아직 따뜻하다

 

                              이상국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

오해와 갈등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데,
결국 나를 세우고 발길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시는 건 하나님.
그 가르침.


내 행복에 집중한다는 건
하나님이 원하심을 행하려 애쓰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찾는 것이 구도(救道).
그 물음에 답을 찾는 것이 삶.

풍장(風葬)


                이상국

 

오랫동안 수고했다
돌쩌귀에 겨우 매달린 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집


저 무너진 아궁이가
우리들 몇대의 밥을 지었다면
누가 믿겠니


새끼내이 잘하던 소는
늙어 무엇이 되었을까
그 많던 제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차일 높이 치고 잔치국수 말아내던 마당에 들어서며
너븐들 쇠장사하던 아무개네 집 아니냐고 아는 체하면
집은 벽을 허물며 운다

..............................................................

지난 주말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모두들 분주한데, 조용히 어머니가 날 방으로 부르신다.
내년부터 시어머니 제사와 함께 지내자고, 내가 45년을 모셨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하신다.


그러마 대답하곤 방에서 나와 가만히 생각을 했다.
일면식도 없었던 시아버지의 제사를 시집 온 후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냈고,
남편도 없이 자식들 키우며 오랜 세월을 모셨으니, 그만할 법도 하다 싶어 생각을 접었다.


그날 밤, 제사를 모시는 내내, 구석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끝도 없이 눈물을 닦아내셨다.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인태... 구절초  (0) 2011.12.08
오규원... 한 잎의 여자   (0) 2011.11.29
유순예... 제비꽃  (0) 2011.11.04
기형도... 10월  (0) 2011.11.02
박남준... 그 쓸쓸하던 풍경   (0) 2011.10.24

봄날 옛집에 가다


                     이상국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며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선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리 가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 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

이제 봄인가 했더니,
잠깐 꽃 잔치 훌쩍 지나고
금세 어린이 날도 지나고,
어버이 날도 지나고,
우리 아버지 제삿날도 지났다.


한밤중, 제사상 다 치우고
누나네, 동생네 다 보내고
혼자 거실에 남았다.


상에 올렸던 술을 병에 채우며,
아마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거라고
허공에 말을 건냈다.


봄 비가 오시는 지,
후두둑 후둑 후둑
티디딕 티딕 티딕
창 밖이 흐려진다.


금세 술 잔도 다 비었다.

'명시 감상 3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재삼... 라일락꽃을 보면서   (0) 2011.05.20
최영미... 선운사에서   (0) 2011.05.18
정호승... 햇살에게  (0) 2011.05.13
임길택... 비 오는 날에  (0) 2011.05.11
장지현... 기다리는 향기  (0) 2011.04.29

기러기 가족


                              이상국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

아, 날개없는 것들의 삶이란...

 

 

'명시 감상 2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찬... 간이역  (0) 2009.10.15
강영은... 가을   (0) 2009.10.15
김동환... 북청 물장수  (0) 2009.10.11
심재휘... 강화도 여관   (0) 2009.10.05
노천명... 장날  (0) 2009.10.02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끊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헤어지기도 늦은 시간

오늘따라 술 기운이 얼큰하게 오른다.


세상에는 둘도 없는 친구와 함께 어깨를 곁고
유행가도 부르고, 군가도 부르고
흔들거리며, 비틀거리며, 위태롭게 세상 가운데를 가로질러 걷는다.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피해

다시 포장마차에 앉았다.
딱 한 잔만 더 마시기로 했다.


우리 상태를 한 눈에 파악하는 노련한 아주머니
참이슬 한 병 대신
따끈한 국물에 국수 한사발을 들이민다.


이유없는 눈물과 외로움까지 섞어

한사발 후루룩 마셔버리곤
계산도 뒤로 하고 다시 어깨동무를 한다.


조금 전보다는 덜 위태롭고
방금 전보다는 가벼워진 발걸음


우리 낳았을때도 국수를 먹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