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살아있으면,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는 게 인연이지
어쩌면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지


좋은 인연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것인지
헤어지고 나서야 알지
보내고 나서야 알지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알고서야
영영 아주 이별 하고서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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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신진호


그 짧은 시간에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서둘러
술잔을 비웠다
알지 못하리라
이런 가슴 아픔을


친구가 돌아올 때
나는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참 어려운 일
좋은 사람이 어울려 좋은 일을 함께 하는 일
참 드문 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관계를 지속하는 일
참 귀한 일


마음을 접고 나니 공허하다
괜찮겠냐는 말이 더 견디기 힘들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웃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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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언어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

저 마누라 말투 보소
내 평생 된 것이 없는 이유가
저 부정적인 말투여
뭣은 이래서 안되고 뭣은 저래서 안되고...
저 주둥이가
사나이가 뭘 하고자 하는 의지를 확 꺾어버려
시벌...


늘 말이 앞서던 사내의 술푸념
술냄새가 역하게 밴 쉰소리를 듣는 내내,
더 낼 안주거리도 없는 주방에서
입이 댓발나온 아낙네는
지겨운 일상을 중얼거림으로 되새김질하면서
거실에 퍼질러진 사내를 흘깃흘깃 째려보면서
가스불을 켰다 껐다하고
프라이팬을 들었다 놨다하고
부엌칼을 들었다 놨다하고....

수평선

                이규리
 

세상에서 가장
긴 자가 수평선을 그었으리라
허리나 목을 백만 번 감아도
탱 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푸른 현


내 눈에도 수평선이 그어졌다
바다를 떠나와서도 자꾸 세상을 이등분하는,
저 높낮이와 명암들


수평선 건져내어 옥상에 걸면
오래 젖어온 생각도 말릴 수 있겠다
.....................................................

첫 눈 살짝 내린
하늘을 누가
설렁설렁 쓸어놨을까?


빗살 비낀 모양으로 한껏 멋을 낸
하늘 위로
공연(空然)한 두근거림
옅푸른 가벼움
사늘한 그리움
민들레 씨앗 흩어지듯
폴폴폴 날린다.


오래 담아뒀던 생각
이제 살살 쓸어내야겠다.

외딴 산 등불 하나

                                  손택수


저 깊은 산속에 누가 혼자 들었나
밤이면 어김없이 불이 켜진다
불을 켜고 잠들지 못하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외눈으로
하염없이 글썽이는 산,


그 옆에 가서 가만히 등불 하나를 내걸고
감고 있는 산의 한쪽 눈을 마저 떠주고 싶다
..........................................................................

가을이 깊어가는 것은


점점 푸르름을 더하는 하늘의 깊이로
낙엽 흩어져 구르는 소리로
가을비의 시린 감촉으로
비어가는 나뭇가지의 헐벗음으로
가슴 한 구석 묻어두었던 그리움의 발효로
느낄 수 있다.


스러져 누울 때까지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
그저 가벼이 보내려 애 씀을
삶이라 해야겠지.


단 한번 마주치지 못하는 생의 엇갈림.
이 가을... 저 강변 어딘가에서,
아니 저 산모퉁이를 돌면,
생전 마주치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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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 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 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 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 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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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난 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기 바라지 않는다.
내 마음을 담은 노래를
단 한 사람이라도 가슴으로 듣기를 바란다.


난 여러 사람이 내 말에 귀 기울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 간절한 기도를
단 한 사람이라도 함께 하기를 바란다.


난 누구에게나 사랑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눈 감는 순간,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곁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다.


사경을 넘나들며 처음으로 나를 불렀던 아버지였다.
그것조차 훗날 전해들은 얘기다.
결국 내가 피했고 임종을 지키지 않았다.
당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길일 것이라고 내 스스로 위안했다.
다시 마주칠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먹서먹했던 이별도
스무 해가 지난 바로 오늘,


아버지가 눈물 나게 보고 싶었다.
난생 처음 겪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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