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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들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

노래를 불러보려 기타를 안는다.
몇 개의 노래 제목과 몇 마디의 멜로디가
바람결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지판 위에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댄다.
기다린다.


글을 써 보려 연필을 든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무수한 단어들과 심상의 조각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머릿속에
뒤죽박죽 뒤섞여있다.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흰 종이 위에 연필심을 댄다.


시작하기 전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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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


아카시아들 일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

 

때 이른 오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아카시아가 한동안 위세를 떨고
이팝나무 산딸나무가 꽃을 주렁주렁 매달았더랬다.


아침에 보니 장미가 가득 핀 자리에
흰 꽃 잎만 몇 장 남기고
오월이 훌쩍 가버렸더라.


유월의 첫 날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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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신용목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키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었다
............................................................................................................................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아니 글을 쓴다는 것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닷물에 수장된 수백명의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이,
이 땅의 어른임이 너무 부끄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한동안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고개 숙여 다시 그들의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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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침몰한지 벌써 한달 남짓 시간이 흘렀다.

수많은 이들의 바람과 기도,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29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그 동안 어린 우리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에 좌절하고 이 땅의 어른임이 미안하고 슬펐다.

 

어린 아이들이 300명 넘게 희생된 이번 사건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선주, 선장, 선원들을 비롯한 관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선자들의 구조를 위해 총력을 쏟겠다던 해경, 총리와 대통령까지 어느 누구 하나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어른(?)들...
그들은 결코 그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이번 참화는 우리 사회가 가진 치부를 안팍으로 낱낱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부패할대로 부패한 이 땅의 관료와 정치인들의 경악할만한 - 아니 사람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 행태며,

배포한 보도자료 따위나 읽는 방송,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왜곡하기에 바쁜 언론과 기자들의 한심한 작태며,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우리 어른(?)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 펴보지도 못한 아이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고, 절망한 국민들이 차라리 떠나고 싶은 이 땅에

밝은 미래나 희망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동화작가 분의 말씀이 주말내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늘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다고...

하지만 이 땅은, 우리 대한민국은 더 이상 아이들이 꿈이나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국민들이 외면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있을까?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 아이들이 꿈을 꾸고 희망을 품을 수 없는 대한민국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우리는 다 한가지쯤의 상처를 안고 살아 간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상처의 본질은 대부분은 비슷비슷하다.
사는 동안 이리 저리 부딪히고 서로 상처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삶의 모습이니 하나쯤 아픔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의 상처가 훨씬 깊고 아프고 크다고 느낀다. 제 상처가 고통스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 내 아픔을 알아줬으면 하고 바라는 건 그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이 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하지만 그것도 욕심일지 모른다. 아주 작지만 분명히 욕심에 가깝다.

어쩌면 그나마 기대할 사람이 있으면 다행인 게다. 내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난 잘 살고 있는 게 맞다.

제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주고 쓰다듬어 줄 사람이,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치유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남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누군가에게 나를 알아 달라고 내 아픔을 이해해달라고 내 상처를 만져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상대방의 아픔을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고 나눌 수 있는 빈자리를 조금 마련해 두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
누군가를 믿는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결국 상처를 극복하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사람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속에서 자연스럽게 치유된다.

비록 작은 상흔이 남더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그렇게 사는 게다.
날씨도 아주 가끔은 흐리고 비가 오지만, 대부분은 맑고 화창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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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의 시간은 이 땅을 딛고 사는 누구에게나 참으로 가슴 아프고 슬프고 참담한 시간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역시 그랬다. 제 정신을 차리고 일이라는 걸 손에 잡는데 꽤 힘이 들었다.
이번 세월호의 침몰은 사는 동안 언제든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재난, 사고 등의 참화와는 여러모로 많이 달랐다.

사고 후 하나 하나 알게 된 사고의 원인, 구조 과정, 언론의 보도와 국가의 역할, 책임자들의 책임있는 행동과 소통,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되는 것 하나 없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아이들이, 너무 많은 아이들이 찬 바다에서 고통받다 죽어가고 말았고,

우리는 생중계되는 수많은 뉴스를 혼란 속에 가슴 치고 울며 계속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더 가슴 아파했고 더 침통했던 것 같다.

이미 사고는 단 한명의 생존자 없이 마무리 되고 있고 겨우 시신 수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사회의 관료, 기득권자들, 위정자들의 경악할만한 행태들과 뿌리 깊은 관료주의의 병폐, 정치의 부재를 지켜봤고,

아무 것도 할 수없는 나머지 사람들 - 그냥 착하게 자기 역할을 하며, 제 위치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 - 의 무기력함도 뼈져리게 느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 보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 또한 내 가족과 회사와 사회를 위해 열심히 살아왔고 내 몫을 하기 위해 제 자리에서 성실히 잘 살고 있다.

건강한 몸과 안정된 직업과 예쁜 아내와 사랑스런 아들 딸과 함께 잘 살고 있다.

집도 두 채 있고, 통장에 잔고도 제법 있으며,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중형차를 몰고 다니며

종종 여행을 다니고 사진 찍고 기타치고 아름다운 시절의 노래 부르며 남부럽지 않게 아주 잘 살고 있다.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이 땅에서 아주 잘 살고 있는 우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어린 영혼들을 보고 있자니 죄스럽고 미안했다.
페이스북도 밴드도 카카오톡도 블로그도 모두 닫고 싶었다.

 

난 지금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부터 조금씩 바꿔가면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나한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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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추억의 통기타 7080 "SPACE"
글쓴이 : 추억의 통기타 7080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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