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새에게 새벽을 묻는다

     
                                          심재휘

 

모든 나무가 세월을 짐 지고 있으니
새들은 어느 가지에서 울어야 하는가
초승처럼 휜 저녁의 가지에서 새들도
새벽에는 그믐의 가지로 건너갈 터인데
시간의 정처 없는 저 가벼운 몸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잠에서 깨어나
늪 속의 나무처럼 서러운 나이테를 세다가
나는 새벽에 이렇게 들었다
헛똑또옥 헛똑또옥
무엇에다 대고 쐐기를 박는 소리인가
未明의 소쩍새 우는 소리


날 밝으면 나는 오늘도
졸업장을 받으러 문을 나설 테지만
결국 이 밤의 집도 길이었다고 말할 테지만
아직 배우지 못한 이 절반의 어둠
어떤 표정으로도 지을 수가 없구나
생이란 그저 깊어가거나 낡아갈 뿐이라고
어둠과 밝음은 서로 다르지가 않다고
신문 넣는 새파란 소리 버스 지나가는 저 먼 소리
단단한데도 만질 수가 없구나
때론 햇살 속에 비가 오고 어딘가에선
죽은 나무에 날리는 버섯의 향기 그윽할 텐데
사는 동안은 정확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일까
어둡고도 밝은 이것을 몰라
소쩍새에게 새벽을 묻는다
.................................................................................................

내 마음에 동요가 일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지러울 때
내 몸을 흔들어 깨워야 해.
내 마음이 평안을 잃고 머리 한 켠에서 풍랑이 일면
내 맑은 정신을 깨워 일으켜야 해.
뒤를 돌아보고 주저앉으면 안돼.


영혼이 길을 잃어 방황하는 이유는
낯선 세상의 길이 워낙 복잡하고 많아서야.
어딘가엔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지.
믿고 가야한다면 바로 지금
기꺼이 발걸음을 옮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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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그림


                          박철


새해가 오고 새봄이 오고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는 않으리
당신이 내 마음에 새겨 준 꽃그림 문신 하나
그 푸르른 자국을 지우진 못하리
누군들 좋아 어둔 골목길에 기대어 섰고
누군들 좋아 빈손 저어가며 사랑을 노래하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의 한가운데
잡을 수 없는 바람이 맡기고 산 삶을 살다가
당신이 잠시 잠을 일깨워 푸른 햇살을 보다가
나 다시 그 깊은 잠으로 돌아가니
지우지 못해도 슬퍼하지는 않으리
먼 훗날 내게 묻는 이 있어
꽃그림의 주인을 찾으면
젖은 얼굴 가득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나 당신의 이름을 불러 보리
......................................................................

잘 가라.
한 때나마 너로 인해 즐거웠다.
너로 인해 살아있음에 행복함을,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함을 아는구나.
꽃 피는 것 참 잠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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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쓰다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선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 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

이제 막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정말 빗방울 냄새가 물쿤하게 피어오른다.
비가 오니 괜시리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아진다.


세상 사는 일은 어쩌면 제 마음을 닦아 내는 일.
소복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하고,
어질러진 주변도 정리해야 하고,
어수선해진 마음도 추스려야 하니,
마음만 바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몸을 먼저 움직일 일이다.
평소에 주변 정리정돈을 열심히 하고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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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박남준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 일도 어쩌면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지
후두둑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
진다 덧없다 덧없이 진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다


모진 바람불고 비,
밤비 내리는지 처마끝 낙숫물 소리
잎 진 저문 날의 가을 숲 같다
여전하다 세상은
이 산 중, 아침이면 봄비를 맞은 꽃들 한창이겠다


하릴없다
지는 줄 알면서도 꽃들 피어난다
어쩌랴, 목숨 지기 전엔 이 지상에서 기다려야 할
그리움 남아 있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너에게, 쓴다
...........................................................................

연 초록 잎 싹이 나기 전에 피는 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며칠 따뜻한 기운이다 싶었더니만
개나리 한 가지에 새 잎이랑 꽃망울이랑 다 같이 매달렸다.
자목련, 백목련, 벚꽃까지 앞다투어 피고 난리다.


꽃 잔치를 한 번에 마치려는 듯
노란 꽃, 분홍 꽃, 흰 꽃, 보라 꽃이
한꺼번에 여기저기 온 천지 사방에 다 폈다.


꽃 잔치가 벌어져서인가?
가슴도 두근거리고
심장도 벌렁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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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신용선


혼자 간직할 일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혼자가 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을 마음 깊은 데
담으면서
마음 닫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여는 것은
상처를 내보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누구에게나
마음 한구석 감춰둔 무엇인가가 있겠지.
아무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겠지.
혼자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아픔이 있겠지.
누구나에게 다 있겠지.


좀 다른 점들이 있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부끄럽고, 시리고, 아프다.


실은 별 것 아니었는데
안고 있으려니 힘들었고,
덮어 놓았으니 썩어버렸고,
그래서 아팠을까?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실은 누구나 다 그러했다.
그걸 다 꺼내보고나서야 알았다.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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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병이 깊으면


                              박남준


먼산은 언제나 길 밖의 발길로 떠돌았으므로 상여처럼 돌아가는 길가,
등뼈 깊이 봄날이 사무쳐서 어지러운데, 두 눈에 장막은 일어 몸,
휘청이는데 얼마 만인가 마당 가득 풀들은 어느새 저토록 자라났는지,
나 먼 길 떠나고 사람 손길 닿지 않으면 이내 저 풀들,
어두운 내 방 방구들에도 솟아나겠지.


풀을 뽑는다.
한 포기의 풀을 뽑는 일도 마음대로 쉽지 않아서
모질게 다져먹지 않고는 손댈 수 없다.
쇠별꽃 봄맞이꽃 꽃마리 개미자리, 서럽다. 곷들이 피어난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것은 조금 크고
어떤 것은, 보기에도 안쓰러우리만큼 작고 깨알 같지만
어느 것 하나 눈물나지 않은 것 없어 이 짓이 뭐람, 이 짓이 뭐야,
한 움큼 뽑았던 풀들 놓아 버리고
주저앉아 마음 처연한데, 앞숲인지 들려오는 너 두견,
울부짖느냐 무너져내리는 새소리.
..................................................................

환갑이 다 지나고, 큰 병을 겨우 이겨내고서야
오늘 하루의 감사함을 알았다는 한 여인의 강연.


열심히만 살아 왔던 여인,
삶의 시련 앞에 늘 그녀는 원망하고 분노했단다.
하지만 어느 날 뜻밖에 암이 걸려
수술도 치료도 어렵다는 사형선고를 받고
차라리 목숨을 끊으려 절벽으로 뛰어내렸건만
나뭇가지에 발목이 걸려 살았단다.


그 딸을 구한 당신의 어미가
'내가 오래 살아 이런 고통을 딸이 겪게 됐다'고
그 날로 곡기를 끊고 하릴없이 세상을 등지셨단다.
그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남겨진 딸은 한없이 한없이 운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중하다'고 한마디 남기고
홀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신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고통과 시련을 다 이겨내고 다시 새 삶을 얻어 살고 있다는 여인.


지난 얘기를 하는 중에 북받치는 설움을 참아 넘기는 게 힘겨워 보였다
아직 설움이 다 가시지 않고 가슴에 남았던가?


오늘 하루 얼마나 소중한가?
이름 값, 나이 값, 제 값을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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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는 영혼

 

                          정유찬 


그것은
순수한 명상으로 잔잔해진
신성한 연못이다


그러면서도
열망으로 가득찬 불덩이가 아닌
차라리 푸른 불꽃


열정과 갈증 사이를 오가며
여러 차이와 경계를 허물고
어둔 길을 어둡게 두지 않을 빛


비록 타고난 방황처럼
발걸음 어지러이 느껴질 때조차
캄캄한 어둠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한 방랑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거룩하고 숙명적인 사색의 본능이니


사실, 길을 찾지 않는 영혼은 없다
.............................................................

방향성이라는 화두를 들고
무엇인가 있다는 믿음으로
감사를 부르며 걷다.
살아야하는 이유를
길 위에서 찾다.


그 길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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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고은


씨 뿌렸더니
여기
여기
저기 좀 보소


어제는 누가 흙으로 돌아가더니
오늘 아침 이렇게 태어나
이 세상 만년 파릇파릇 새싹이구려


결국 여기서는
나에게까지
나에게까지
급한 물에 떠내려온 나에게까지
곡식 익은 뒤의 추위 가운데
사랑밖에 없다


저기 저기 좀 보소
.............................................................

가만히 들여다보니
초록 기운이 살짝 오른 나뭇가지 끝마다
새잎 날 자리에
물방울이 꼭 한 방울씩 맺혔고
취며, 엉겅퀴며, 속새며, 부처손이며
이른 봄 풀들이
살금살금 번지는 숲

마침 찾아 든 까치 한 쌍
수선스럽다.
반갑게 맞아야지.
꺅꺅꺅꺅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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