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쓰다


                          정끝별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

세상을 덮을만큼 무거워진 눈꺼풀을 잠시 닫고
세상을 흔들어대는 머리를 베개에 가만히 뉘였다.
방바닥이 그만 푹 꺼져내린다.


언제 잠들었나?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누군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코고는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시계보다 먼저 눈에 띈 거울
가만히 들여다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린다.


다행이다.
방바닥이 꺼지지도 않았고,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잠시 다시 눈을 감았다.

수백개의 톱니바퀴가
시계바늘 한 눈금을 움직이기 위해
일제히 돌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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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

사는 이유가 별스런 것이 있지 않고
산다는 게 별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이, 매순간이 모두 삶의 이유지.


죽지못해 살면 안되지.
한 번 살아봐야 하는 것이지.


얼마나 귀한 순간이며
얼마나 감사한 삶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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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경(三四更)


                            고은


천 번 만 번 어두운 밤중
저 혼자 울부짖어서
꽃 한 송이는 핍니다.
그 옆에서
붉은 꽃 한 송이도 벙어리로 핍니다.
...........................................................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상처주지 말길...
그는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으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의 치료와 잠시의 휴식과 위로일텐데ᆢ


내가 얼마나 많이 참았는 줄 아냐고 날을 새워 겨눈다면 그는 어찌해야 할까?
너는 무엇을 위해 그 세월을 그렇게 참고 살았는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참아야하는 시간...
결국 다 지나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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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깊은 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湖水에 힌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그 나라에 가실때에는 부디 잊지마서요
나와 가치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山비탈 넌즈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힌염소 한가히 풀뜯고
길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어머니 부디 잊지 마서요
그때 우리는 어린 洋을 몰고 돌아옵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五月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 한들 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 그나라에서


양지밭 果樹園에 꿀벌이 잉잉거릴때
나와 함께 고 새빩안 林檎을 또옥똑 따지않으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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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바닷가


                              송수권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 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채워 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

해질녘을 보겠다고
발걸음 서둘러 언덕배기 올라
강 풍경이 오롯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오르다.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나 가야하는지 헤아려보지 않아도 되었다.
강따라 해지는 풍경이 다 말해주고
그냥 아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겨우 이마에 맺은 땀방울 몇 개 만큼의 수고로

누리는 호사
그 은밀한 조화
그 긴밀한 비밀


어느새 해는 지고
돌아드는 갈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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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추억이 있는 통기타 공간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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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멍하니 멎다 
 

                                강경화 
 

자르다 놓아둔 애호박의 조각마다
송골송골 베어 나와 끈적이는 둥근 눈물
아파서 흐르지 못한
그리움
투명하다
...................................................................

못보고 지나치는 것이 나았다.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지겹다.


왜 내 마음을 모르냐고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상대를 원망할 일이 아니라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한 번쯤 고민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그 결과로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무엇을 상상하든 그건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다.
이미 내 머리로 짜놓은 시나리오 안에서
현실을 가늠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늘 놓치고마는 일상의 감사는
실은 삶의 전부이다.
그 한가로움은 정말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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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한 잎 흔드는 바람결처럼
그렇게 생각이 오지.


뜨거웠던 여름 내내
예비된 시간에 대한 사유,


한 잎이 떨어지는 순간,
경이로운 증거가 되지.


길바닥에 흩어진 낙엽을 쓸어 모아
태우는 소릿결처럼 사르락 사르락 오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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