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음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아는 자만이
사랑을 논할 것이다.
귀함과 중함을 구별하는 자만이
순간을 논할 것이다.
그 소중한 땀과 인내의 눈물을 아는 자만이
영원을 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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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추억이 있는 통기타 공간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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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동화


                     고미경


파장의 우시장으로 모여드는 아이들
흘린 동전을 찾으려고 소눈깔을 굴린다
진종일 노름판에서 광땡을 잡느라
눈이 더 뻘건 아비
푸른 멍자국 어미가
쇠똥으로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장바닥
짤랑짤랑 소리나는 희망 몇 닢을 줍고
땟국 전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쇠똥냄새가 아이들과 숨바꼭질한다
어제는 찌그러진 양은 밥상머리에 코를 박고
한 그릇의 가난을 우적우적 씹고
오늘은 박살난 세간들이 널부러진 대문 앞에서
시커먼 손등으로 눈물 훔치며 소눈깔을 꿈벅거린다
저 놈의 웬수는 귀신도 안 물어가냐는
어미의 시퍼런 악다구니로
가슴 속에서 칼을 키우다가
초등학교 졸업장 받기 무섭게
객지의 공장으로 식당으로 미장원으로 흩어져
누더기진 생을 밤새워 꿰매며
소처럼 울었던 아이들
온양 실옥동 옛거리
시멘트 담벽 곳곳에는 아직도
소울음 메아리진 저녁답이 묻어 있다
..................................................................

어릴 적 가슴팍의 멍자국은
영영 보랏빛으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어떻게든 감추려 자꾸만 옷자락을 싸맸다.


지긋지긋한 인고(因苦)의 세월,
아슬아슬한 생사의 고비,
간혹 허망하게 가버린 시간을 돌이켜
잔을 기울이고 한참을 주저앉아 울고 또 울곤 했다.


법당 앞마당 가득 걸린 연등 불을 켜라 명을 받고,
'이 많은 등을 언제 다 켜느냐' 는 우문(愚問)에
'하나 하나 켜면 되지요' 하는 짧막한 대답과 미소.


어느새 경내(境內)를 가득 밝힌 연등 아래
저절로 합장을 하고 마주 선 여승과 나.


'성불하십시요'
하고 돌아서는 소릿결에서
'아, 이제 인고(因苦)의 세월도 끝이 나겠구나.'


탄성이 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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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과 관절염

 
                        박철


언젠가
관절염에 걸리고
관절염이 깊어지면 걷기도 힘들 것이라 믿어
시시때때로
들길을 걸었다
 

이제
관절염에 걸리고 무릎이 아프다
다시 시시때때로
관절염 치료를 위해 나는 들길을 걷는다
 

그러니
나는 평생 관절염과 함께 지내온 셈이다
들길을 걸어온 셈이다
.............................................................

동행(同行)은
같은 생각일 필요는 없다.
그저 같은 방향이면 족하다.


같은 속도일 필요도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쳐 가더라도, 뒤쳐져 가더라도
함께 그 길을 가면 족하다.


생각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더라도
맞춰가려 애 쓸 필요는 없다.
동행(同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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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말


                        정 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주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무엇이 저리 사무치게 그리울까?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것 속절없건만
싹 쓸어버리지 못하고
이제 모양새도 제대로 없는 그것을
또 다시 주섬주섬 주워 담고 있다.


                       이형기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 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

삶은 늘 혼자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사는 동안

고독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은 늘 초행이고 그래서 항상 낯설다.
어쩌면 사는 동안

끊임없이 길을 찾아 방황하고 헤맬 것이다.


삶은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사는 동안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나을 것이다.


사는 동안 좀 덜 외로우라고
가는 동안 좀 덜 힘들게 가라고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그래, 인생은 단 한번의 추억여행이야


                                             김정한

                                 
눈물겹도록 미친 사랑을 하다가
아프도록 외롭게 울다가
죽도록 배고프게 살다가


어느날 문득
삶의 짐 다아 내려놓고
한 줌의 가루로 남을 내 육신


그래, 산다는 것은
짧고도 긴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


처음에는 나 혼자서
그러다가 둘이서
때로는 여럿이서
마지막에는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이겠지


산다는 것은
사실을 알고도 모른척
사람을 사랑하고도 아닌척
그렇게 수백번을 지나치면
삶이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겠지


아~ 그때는 참 잘했어
아~ 그때는 정말 아니었어
그렇게 혼자서 독백을 하며 웃고 울겠지


아마도 여행 끝나는 날에는
아름다운 여행이기를 소망하지만
슬프고도 아픈 여행이었어도
뒤돌아보면 지우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되겠지
짧고도 긴 아름다운 추억여행


그래,
인생은 지워지지 않는 단 한번의 추억여행이야

.......................................................................

어쩌면, 아니 언젠가는...
지난 시간은 모두 추억거리겠지
전부 아름다울 수는 없겠지만...


시간은 한 순간도 멈추는 일이없지
끊임없이 변화하지.


우리 삶도 마찬가지지.
변화하지 않고 멈춰 있는 일은 결코 없지.
내가 아무런 의미없이 흘려보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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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이병률

 

샀는지 얻었는지
남루한 사내가 도시락을 들고는
공원 의자 한쪽에 올려놓더니
가까이 있는 휴지통을 뒤져 신문지를 꺼낸 다음
한 치의 망설임없이 도시락을 엎는다
다시 음식을 담은 신문지를 잘 접어 보퉁이에 챙긴다
행복을 바라지 않겠다는 것일까


빨래를 개고 있는지
옷감을 만지고 있는지
그녀는 옷을 쥐고 재봉틀 앞에 앉아 있다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는 것 같았다
만지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파르르 온몸을 떨더니 바늘로 생손가락을 찌른다
행복을 꿰매겠다는 것일까

 
어느 날 길이 나오듯 사랑이 왔다
사랑은 어떤 사랑이 떠날 때와는 다르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왔다
허나 저울은 사랑을 받치지 못했다
무엇이 뼈고 무엇이 살인지를 모르는 극지로 흘러갔다
상자를 받고도 열지 못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절벽에다 힘껏 던졌다
행복을 공중에 매달겠다는 것이었을까
..................................................................

행복은 과거의 어느 모퉁이부터
지금 여기까지 곳곳에 널려 있겠지.
기억 속에 남겨진 것도 있고
영영 잊혀진 것도 있겠지.


종종 그 추억거리가 행복인 건 맞지.
행복을 바란다고
누구나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


하지만 행복은 철저히 주문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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