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쓸쓸하여

                         
                                 도종환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넘길 새도 없이
며칠째 풀어 헤친 앞섶도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데
또 메마른 마음 밭에 바람이 분다


잠시 머물다 일어난 자리마다
마른 먼지가 풀썩풀썩 인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등을 돌려본다.
그런데 왼가슴 켠이 무척 시리다


가까이 있다고
더 많이 들어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더할수록 메말라가는 생각,
마주해야 하는 이야기,
혼자 할 수록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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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참나무 숲에 살았네


                                     정끝별


비가 내리었네
온종일 오리처럼 앉아 숲 보네
그렇게 허름했던 사랑의 이파리
허물어진 졸참 가지에
넘어지며 나는 가고 있네
내 나이를 모르고 둥근 하늘 아래
잎이 피네 짐처럼 지네
잎이 지네 나도 흙먼지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
꽃이 피리라 기약치 않으리
숲 기슭에 오리처럼 앉아 있네
비가 많이 내리네
...............................................

심장이 바짝 말라 붙어야만
비가 오시는가?


절박함으로
간신히 팔을 들어 허위허위 손짓한다.


허공은 겨우
한마디 묻더니 그냥 돌아선다.


무엇을 바라는가?


피와 땀, 눈물이 밭아 버려야만
열매 맺으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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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이상교


그가 세수를 하느라
푸닥거리는 소리가 새삼 귀하다.
.......................................................

소리로 전하는 메시지는
보여지는 것보다는 확연히 깊다.


일상이 전하는

깊고 의미있는 수많은 소리들에
귀 기울여보면 안다.
이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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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고영민


배롱나무의 꽃이 지고 있다
배롱나무의 꽃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저녁마다 숱한 꽃다발을 내게 바쳤으나
나는 미욱해 그걸 다 받아주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꽃다발을 바치는 것
저녁 늦게까지 온몸이 꽃다발이 되어
들고 서 있는 것


그럴 때 배롱나무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갖고 있었을까
꽃들은 지나온 시간의 모든 것을 품은 채
떨어져 있다
밑동을 만지면
먼 가지의 꽃이 흔들리던 나무
바닥의 꽃들은 아직 붉고
바람은 그늘 속에 엎드려
미루어놓은 말들로 중얼거리고


지난 것은 다 진 것일까
나도 한때 누군가를 위해 꽃 한 다발을 들고
오래오래 문밖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빈손의, 어둠에 몰두해 있는
배롱나무에게
................................................................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는 것
하지만 온전히 전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지닌 것을 모두 버리는 것
다시 주워담을 수 없음을 아쉬워하지 않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묵묵히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아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같은 곳을 바라보고 먼 길을 떠나는 것
가다 가다 헤어져도, 다른 길을 가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다시 만나 그 동안의 이야기 나눌 때
그게 사랑이었는지 다시 묻지 않아도
시린 빈 손 한 번 잡을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을...


이 생에서
꽃이 피는 시간은 찰라에 불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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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하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아주 오래 전 다 지나버린 아픔을 얘기하는데
푸른 물감이 번지듯 가슴에 슬픔이 가득 번진다.


아무 것도 남아있을 게 이젠 없을텐데 했는데
눈에 띄지 않는 곳 어딘가에 응어리가 남았나 보다.


이야기가 넉넉히 익어갈 무렵,
누구나 다 한가지씩 가슴에

아픔을, 슬픔을 묻고 산다고
위안 아닌 위안을 삼고 일어서는데
한 쪽 다리가 저려온다.


그럼 저리지나 말아야지
그럼 아프지나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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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이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세상 살이의 맨 먼저 해결해야할 숙제인데
그것 알기가 참 만만치않다.


삶은 분명 결국 혼자 왔다 가는 것인데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


그런데 가만보니
쓸 데 없는
내가 왜 이렇게 많은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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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박철


울며 태어나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고
다시 사랑하고 사랑하다 쓰러지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면
내가 쓴 시는 사람의 시는 아닐 듯하다
그저 외로움이라는 유기물이 장맛비에 쓸려가며
골짜기에 그어댄
빗살무늬
 

비가 오는구나 이웃이 준 애호박을 핑계 삼아
노친(老親), 칼국수를 만드는 염천(炎天)이다
빨래를 주무르는 손
밀가루를 반죽하는 손
늙으신 어머니의 갈퀴손이 쓰다듬는
빨래에서 물때가 스스로 양보하며 빠져나가듯이
밀가루가 제 스스로 몸을 섞고 있었다
얼마나 위대한 관계인가
어머니의 탄금(彈琴)이 헐은 집안 살림을 춤추게 하고
빛바랜 벽지도 소쩍새 울음에 오수를 누린다
신문 내려놓고 비 맞은 애호박처럼 연한 조바심으로
굽은 등 뒤에서 바라보니
어머니는 한 편의 시를 썰고 있었다
식민에서,
난리 겪고,
피난 오고,
시집살이에,
새끼들 키우고,
시부모 공양하고
 

여자의 일생이 그러하다면
내가 쓴 시는 사람의 시는 아니다
제 그림자도 지우며 걸어가는
무기물이 부르는 한갓
바람소리

 
고향은 어디 황해도 앞바다 깊은 곳이었을 듯
멸치 몇 다녀간 시원한 국숫물 한 그릇 들이키고
사발 내려놓으니
여자는 입이 하얗게 벌어지며
새끼 하나 보고 웃느니
....................................................

갑작스런 지인의 모친상 기별에
천리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먼저 고인께 먼 길 살펴 가시라고 절을 올리고,
상주에게 잘 보내드리라고 당부를 하고 돌아서는데
환갑이 다 된 이가
밤송이만하게 된 눈을 뛰룩거리더니
영정앞에 주저앉아 엄마엄마하며
아이처럼 또 훌쩍훌쩍 운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볕이 따갑고

눈도 시리고
코 끝이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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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송수권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래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 쪽 배밭의 배꽃들도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소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 봄은 빰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연초록 움들처럼 차오르면서, 햇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와 같이 뺨 부비는 것, 소근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

아, 해질녘 풍경이 저토록 눈부시던가?


오로지 앞만보고 걷던 힘겨운 걸음
이젠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 본다.


저리 많은 생명이
어느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사소하다 생각했던 것들
어느 하나 그냥 된 것이 없음을 안다.


가슴에 작은 믿음의 씨앗을 받았을 뿐인데
감사한 일들로 넘쳐나
일상이 기적이 되고, 삶의 이유를 깨닫게 된다


감사한 일만 손꼽아도 모자라
아침저녁으로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린다.


꼭 서쪽으로 창을 내려 한다.
해질녘까지 흘린 땀방울을 말끔히 씻고
너울너울 덩실덩실 춤추며

저녁 놀을 맞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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