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기의 노래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

밤새워 혹은 몇 달 몇 년을 애를 썼건만 더 나아지기는 커녕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훨씬 퇴보한 것은 아닌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꼬여만 가고,

순간 순간 화가 솓구쳐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이럴 땐,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도 멈추고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고


쉬어라.

그냥 잠시 쉬어라.

가만히 쉬어라.


진심으로 일군 마음밭이
망쳐지는 경우를
나는
단 한번도 본 일이 없다.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
.......................................................................

빈틈을 찾을 수 없을만큼
꽉 들어찬 햇빛
어느 한구석 그림자 뉠 자리도,
잠시 앉아 쉴 한자락 그늘조차
찾을 길이 없는...


깜빡 졸음같은 한세월
겨운 졸음 쫓으려
부채 삼아
헛손질...


한나절 마실 다녀올 곳도
영 마땅치 않은...

난감한 사랑


                            오인태


산은 좀체 안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도 그 산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 해 여름 내 사랑은
짙은 안개 속처럼
참 난감해서 더 절절했다.
절절 속 끓이며
안으로만 우는 안개처럼
남몰래 많이 울기도 했다.


이제야 하는 얘기다.
...............................................................

하나 더하기 하나가 적어도 둘은 돼야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꽤나 여러가지다


하나가 온전치 못하거나 혹은 넘치거나
지나치게 외편향적이거나 혹은 너무 배타적이거나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거나 혹은 체질이 다르거나
태생이 다르거나 혹은 눈높이가 다르거나
온도차가 심하거나 혹은 속도차가 심하거나
사상이 다르거나 혹은 방향성이 다르거나


하나 더하기 하나가 얼마가 될지 알기는커녕
둘도 되지 못하면
제발 빨리 잡은 손을 놓기를...


나도 이제야 하는 얘기다.

하늘은 높고 땅은 조금씩 늙어간다


                                                   이영유


하늘은 맑고 빨래는 깨끗했다


격에 맞게
서두르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모나지 않았으며
지붕은 고요해...


창문은 생각들로 늘 어지러워


불을 켜자
어둠으로부터 한 생각쯤 뒤로 물러나
예사롭지 않은 소리
들린다
같이 있는 모든 것들 실은
언제나 저 혼자


웃음 소리 크고 작게
밤바람으로 휘몰려 다녀
어디선가 또 비명
울음 음울 울음


어느 세상 한 귀퉁이 다시 무너져내리는가?


지붕은 늘 그대로
모양도 늘 그대로
생각은 살아온 길만 추억하고


땅은 조금 조금씩
늙어간다
.........................................................

생각의 끝을 보려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생각이 불쑥 찾아와 날이 새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끝이 없을 것같은 질문과
답을 찾을 수 없을 것같은 허허로움이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게 했다.


어느새 창밖에 희미한 밝음이 번진다.
생은 한 번의 죽음만을 허가하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단 일초도 더 허락하지 않는다.
그 유한성을 깨닫는 게 먼저였다


하늘에 띄운 연 실이 풀려나가듯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에 주루룩 풀려나갔다.


생각이 멈추는 순간,
뒤통수에서부터 눈두덩으로
뜨끈한 피로가 천천히 밀려온다.
단 일초도 뜬 눈을 더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찔레꽃 이야기


                           박이도


찔레꽃을 아느냐
찔레꽃은 몰라도
찔레꽃 냄새는 알지요


시집간 아낙네들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들이 풍겨주던 찔레꽃 냄새
살 냄새는 알지요


유월, 감자바위 골짜기의
찔레꽃을 보러 가요
저마다의 옛이야기
찔레꽃 童話를 들려줘요
.................................................

가시가 많은
찔레꽃 덤불 속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일지 몰라.
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펼쳐질지도 몰라.


달콤한 찔레꽃 향기에 취해
소담하고 아기자기한 자태에 취해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나른한 유월의 어느 날,
어렴풋이 잠들며 들었던
할머니의 옛이야기는
줄거리 하나 없이
소리만 남아, 향기만 남아
내 생의 감각을 흔들어.


살랑 살랑 살랑...
사알 살, 사알 살...

하늘궁전


                               문태준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있다
눈썹만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살고 싶다.
한잠 푹 자고 싶다.

공일오비 (空一烏飛)


                                       유재영


며칠째 이어지는 내몽고 황사바람 속을 뚫고
지도도 없이 맑은 하늘 찾겠다고 나서는 어린 새
자꾸만 목이 마른,
....................................................................

목줄기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가슴팍이 쩍쩍 갈라져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날 때쯤
따스한 온기 품은 봄 비가 달게 내렸다.


삶은
목표도 속도도 아닌
방향이라며?


가슴에 믿음 하나 품은 것은 덤
오늘 얻은 새 삶도 어찌보면 덤


어깨가 절로 들썩
우쭐 우쭐


이제 허리띠 동여매고
잰 발걸음을 옮길 차례


해를 향해 돌아앉아

마주 보고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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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

선잠을 채 털어내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아침상을 차리다
문득 가슴팍이 시려온다.


김치, 계란부침, 김, 된장찌개...
변변히 차릴 것 없는 식탁
그래도 함께 둘러앉은 귀한 시간이
고맙고 고맙다.


'많이 먹어...'
어렵게 건낸 말에


잘 여문 짧막한 대답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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