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를 쓰는 건


                            조병화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 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 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마음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삶을 노래하는 이다.
시인은 세상을 노래하는 이다.


입하나 뻥끗 않고 노래하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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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

내가 가진 것, 가질 수 있는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꺼내본다.
참으로 변변히 잴 것도 없는 품새에
펼쳐보기도 부끄러워 얼른 걷어치운다.


10년을 키운 화초들은 제법 그럴 듯한 모양새를 갖춘 것들도 좀 있다 싶은데,
조심스럽게 거울을 보고, 예전 사진을 보니 나는 10년동안 늙기만 했다.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고 나니,
자작나무 같은 시인은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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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가끔은 시 한 편 읽어 보기도 만만치 않다.

여유란 가지려고 갖게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주어지지도 않는 듯 하다.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

그냥 '짬' 이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잠깐 짬을 내서 이 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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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천 (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갈 대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몇 해전

모 문학회 시상식자리에서

목순옥 여사님을 뵙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시냐고... 나도 목가라고...

그러자 손을 꼭 잡으시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신다.

'왜 목가냐고...'

나도 그 말에 목에 멨다...

소풍이 아름다웠다고만 말하기엔

아직은 너무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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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둥산

 

                                 김선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

 

그녀의 감각적인 시어를 따라잡으려면
늘 한 번씩 다시 되새김질 해 곱씹어야 한다.
한 번 훑고 지나가서는 아랫도리만 부풀어 오를 뿐
그 감각을 제대로 깨우지 못한다.

 

한 번은 시작이라서 짧고 강하게...
두 번째 쯤에 제대로 힘을 써 볼 요량이라면
한마디 한마디 끊어보아야 한다.

서서히, 찬찬히, 세심히, 가만히 가만히 살펴야 한다.

 

오늘 그녀를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마주해 봐야겠다...

 

잠시 덮은 눈거풀 위에 민둥산 새하얗게 펼쳐진 억새밭이 아릿하다.

그 사막을 다 마셔야 한다

 

                                                김신영

 
가시 이파리에 비가 떨어지고

선인장의 발목 뿌리를 적시고

모래언덕을 적시고 사막을 두루 적실 때

한 방울 물도 네 뿌리 곁에 두어

모두 네 몸속에 가두어야 한다

일 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가시로 진화한 네게 내리는 축복

네 몸속에 머물러 굵은 줄기를

한껏 키울 수 있는 축복

열두 달 사막의 열풍을 견뎌야 하느니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뜨거운 열 두 때를 견뎌야 하느니

바람이 실어오는 모래의 따가운 매를 견뎌야 하느니

그 사막을 다 마셔 네 철창에 가두어야 한다

그래 삼백 예순날 다음의 비를 기다릴 수 있다

오늘의 물은 삼백예순날이지만

삼백예순날 보다 오늘은 더더욱 길어

물을 긷는 수고가 네 근성이 된다

사막의 열풍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 너는 그 사막을 다 마셔야 한다

...........................................................................

오늘 하루를 사는 일, 견뎌내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열심히 살아야 하고,

살아있음이 곧 축복이라는 것.

누구나 다 세상을 살아야할 이유를 갖고 태어나며,
누구나 견딜 수 있을만큼의 지혜를 갖게 되는 것.

 

젊은 시인의 호기 어린 말처럼

오늘 그 사막을 다 마셔버릴 듯이,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한 세상 열심히 살아봄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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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가 있던 자리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이윤훈' 시인의 시입니다.


가슴 한 켠 시린 구석,
뻥뚫린 구멍이 없는 가슴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숙명처럼
그 구멍을 틀어막고 숨기고 산다.
구멍이 다시 뚫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 믿고, 다짐도 해 본다.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을 통해
아픈 세월을 들여다보는 시린 마음이
내 가슴 어디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생채기에
또 소금을 뿌린다.


이제는 덜 아프지만,
아니 참을만 하지만
가슴께 어딘가가 시리고 저려오는 곳
아, 또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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