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들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

노래를 불러보려 기타를 안는다.
몇 개의 노래 제목과 몇 마디의 멜로디가
바람결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지판 위에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댄다.
기다린다.


글을 써 보려 연필을 든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무수한 단어들과 심상의 조각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머릿속에
뒤죽박죽 뒤섞여있다.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흰 종이 위에 연필심을 댄다.


시작하기 전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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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도


                 이생진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

아직은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두 아이의 아빠로 10년,
길지도 않았고 남을 것도 없었던 내 아비의 삶. 당신의 아들로 26년,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다 싶은 명삼이 녀석의 친구로 36년,
강원도 삼척 탄광촌에서 난 감자바우로 아등바등 45년을 살았다


궁금하다. 나는 앞으로
어디서, 어떤 이름으로,
얼마나 살게 될까?


하루를 살아도, 아니
지금 이 순간 떠나도
남길 것 없게 살고 싶다.


차디 찬 겨울 하늘
그리움 하나 남김 없다.
사악
눈을 베인다.

그리움 또 그리움


                            박정만


누이야, 봄날엔 네게 슬픔을 주마.
씻어도 씻어도 씻어지지 않고
버리고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옥(玉)처럼 깨끗한 하나의 슬픔을.


누이야, 너는 가슴에 슬픔을 품고
머언 하늘 한끝을 바라보아도 좋다.
꽃잎같이 꽃잎같이 입을 봉(封)하고
머언 봄을 생각해도 좋다 아주 머언 봄을.


누이야, 이 봄엔 네게 피리를 주마.
옥(玉)처럼 깨끗하고 슬픈 하나의 피리를.
불어도 울지 않고 울어도 닿지 않는
저 하늘의 아지랑이 같은 아지랑이 같은......

.............................................................

'그리움' 이란 말을 표현하면 그리움이 된다고...
항상 곁에 있고, 늘 함께 있는데,
그리움이란 말이 가당치 않겠지.


하지만
옥보다 파란 하늘 위에
하얀 그리움이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었는데
저걸 뭐라고 할까?


옆에 있어도 늘 그리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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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마음

                         

                          고두현


휴대폰 없이 산에서 지내는 동안
하늘색 공중전화가 있는
절 마당까지 뛰어갔다가 동전은 못 바꾸고
길만 바꿔 돌아올 때


보고 싶은 마음 꾸욱 눌러
돌무지에 탑 하나 올린다

...............................................

누가 쌓았는지
언제부터 쌓였는지도 모르는
돌무더기


누구의 마음인지
저 속엔


얼마나 많은 바람이
얼마나 많은 그리움이
얼마나 많은 삶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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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지치거든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고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

오늘도 비

이어지는 비에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고

 

오랜만에 차를 한 잔 해야겠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고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을 누린 것이 언제였지

한동안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지

 

여유로움은 어쩌면

무수한 번거로움이 주는

작은 혜택

 

오늘은 기어코 차 한 잔 마셔야겠다

 

이것 저것 꺼내고, 챙겨 놓고, 물을 끓이고, 차를 꺼내고, 찻잔을 닦고

채비를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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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엽서

 

                         김경미


단 두 번쯤이었던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지요
그것도 그저 밥을 먹었을 뿐
그것도 벌써 일 년 혹은 이 년 전일까요?
내 이름이나 알까, 그게 다였으니 모르는 사람이나 진배없지요
그러나 가끔 쓸쓸해서 아무도 없는 때
왠지 저절로 꺼내지곤 하죠
가령 이런 이국 하늘 밑에서 좋은 그림엽서를 보았을 때
우표만큼의 관심도 내게 없을 사람을
이렇게 편안히 멀리 있다는 이유로 더더욱 상처의 불안도 없이
마치 애인인 양 그립다고 받아들여진 양 쓰지요
당신, 끝내 자신이 그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영영 모르겠지요
몇 자 적다 이 사랑 내 마음내로 찢어
처음 본 저 강에 버릴 테니까요
불쌍한 당신, 버림받는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 보고는 하는 사람도 혹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리도 혹 있을까 말예요...
..................................................................................................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누군가를 두고 있다는 것.


하지만 실상은 그 누군가를 진정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제대로 돌본 적이 없는 그 누군가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인지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 누군가가 명확히 누구인지 없는 경우도 많고,
어쩌면 그게 결국 제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가 명확한 대상으로 존재한다면
비록 마음만으로라도 마음 씀에 소홀하지 말라.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가슴은 아직 뛰고있는 것이 확실하니...


그렇지 못하다면...
아, 이 아까운 청춘을 어찌한다...

그리움의 시 

                                    

                             김선굉   

 

널 위하여 한 채의 섬을 사고 싶었다.
파도에 흰 발목을 묻을 수 있는
해안이 낮은 섬을 사고 싶었다.
널 위하여 오늘은 눈이 내리고,
그 속을 내가 걷고 있다.

옛날엔 내 어깨가 아름다워서
흰 달빛을 무겁게 얹을 수 있었고,
머리채에 푸른 바람을 잉잉 머물게 할 수도 있었다.
온 몸으로 눈을 받으며 눈길을 걷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다.

마른 풀잎과 잔 가지에 내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지금 서툴게 걷고 있다.
흰 눈 속에서 홀로 붉고 붉어서,
부끄러워라,
천천히 멈추어 서서 천천히 눈을 감는다.

잠시 후, 눈이 그치면 금오산은
한 채의 희디 흰 섬으로 떠오를 것이고,
내 눈은 아름다운 섬을 아름답게 볼 수 있으리라.
그걸 네게 주겠다.
아아, 너무 작은 내가
너무 큰 그리움을 너에게 주리라.


아리랑

 

                                       김선굉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참 많은 고개를 넘어 또 아득한 세상.
하늘은 너무 푸르러 슬펐고
때로는 낮은 땅으로 내려와 저만치
강물이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었다.
끝이 없겠구나 이렇게 자꾸 흐르다 보면
무궁하겠구나. 그렇겠구나.
흰 옷에 붉게 배이던 소리없는 아픔을 어루만지며
바람은 넘실 끝이 없고
끝이 없겠구나. 그렇겠구나
참 많은 그리움과 참 많은 안타까움과 참 많은 설레임과 참 많은 아픔과 흰 몸과 붉은 마음이
아! 작은 가슴에 너무 많이
흐르고 있다.
걸어가자. 고개 마루나 강가에서
이 뜨거운 흙에 앉아 잠시 쉬기도 하며.
몸보다 먼저 마음이
어느날은 어쩌면 마음보다 먼저 몸이
푸르게 흐를 수도 있으리라.
은통 우리 몸이 귀가 되어 귀 기울이면 들려오리라.
이건 참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4월이 다 지나갔습니다.
꽃잔치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아쉽게 4월이 갑니다.
남녘에는 배꽃이 한창이더군요.
이곳도 5월 초순이면 흰 배꽃이 배밭 가득 펼쳐질겝니다.


배 꽃밭을 떠올리니 벌써 두근거리네요^.^
넘실넘실한 그리움의 시인 김선굉 시인의 시입니다.
'굉' 자가 무척 낯설지만 한자(漢字)는 간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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