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 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종기... 꽃의 이유  (0) 2012.06.15
문태준... 짧은 낮잠  (0) 2012.06.13
김명은... 봄날  (0) 2012.05.30
강현덕... 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  (0) 2012.05.29
이정록...더딘 사랑   (0) 2012.05.17

평행선


                   김남조


우리는 서로 만난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 합니까
가까와지면 가까와질까
두려워하고
멀어지면 멀어질까 두려워하고
나는 그를 부르며
그는 나를 부르며
스스로를 저버리며 가야만 합니까
우리는 아직 하나가 되어본 적도 없지만
둘이 되어 본적도 없습니다.
..............................................................

만나기도 어렵고, 헤어지기도 쉽지 않다.
영겁의 세월의 두께가 쌓여
겨우 한 번의 옷깃이 스친단다.


진정, 인연이란 그러하다 믿는다.

'명시 감상 3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은... 꽃이 지는 길  (0) 2011.06.03
이정록... 봄비 내린 뒤   (0) 2011.05.31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0) 2011.05.20
박재삼... 라일락꽃을 보면서   (0) 2011.05.20
최영미... 선운사에서   (0) 2011.05.18

서시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하여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다소 외지고
좁다란 길이라도 괜찮다.
내게 남은 길이
번잡스럽거나
소란스럽지 않았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겨울 꽃

 

                        김남조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서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꽃 앞에

오랜 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 되었어

...................................................................

'명시 감상 3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성우... 기다림의 시  (0) 2010.12.20
박남준...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0) 2010.12.16
박기섭... 구절초 시편  (0) 2010.12.14
박건한... 그리움  (0) 2010.12.13
박인환... 세월이 가면  (0) 2010.12.08

6월의 시


                   김남조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닷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

'명시 감상 3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태주... 숲  (0) 2010.06.14
이종만... 별  (0) 2010.06.07
김초혜... 사랑  (0) 2010.05.19
김초혜... 사랑굿 9, 10  (0) 2010.05.18
김초혜... 사랑굿 7, 8   (0) 2010.05.18

겨울 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


허무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명시 감상 2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종목... 눈오는 산사(山寺)에서   (0) 2009.12.29
천양희... 지나간다  (0) 2009.12.27
문태준... 맨발  (0) 2009.12.15
이문재... 농담  (0) 2009.12.11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0) 2009.12.10

설일 (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했을까?

 

내 존재의 의미를,

눈(자연)의 고결함을,

우리 생의 은총을,

사랑의 섭리를...


가치있는 삶의 주제들을 나열하면

이 몇 가지 쯤이 될 것이다.

살다보면 중요한 순서야 그때 그때 정해지겠지만

지금 내가 어디쯤일지 생각해보면

 

아마도 '어디쯤'이 될 것이다.

 

참 알, 수, 없는 우리 삶이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동주.... 별 헤는 밤  (0) 2009.03.17
윤후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0) 2009.03.12
강은교...진눈깨비  (0) 2009.03.04
이상... 거울  (0) 2009.02.19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겨울 햇빛

                       김남조
  

1.
겨울 햇빛은 아름다워라
안개 반 햇빛 반으로
우유처럼 부드럽고
둘레 사방은
구름의 휘장만 같아라
문득 거기에 들면
이승 저승의 칸막이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
기다려 섰으려니 싶어


아슴하고
눈물겨운 회귀심,
모처럼 음식으로
배부른 이의 감사,
유리살결 얼비치는 회오가
불현듯 내 마음임을


2.
겨울 햇빛은 이상하여라
누군가 등유와 불심지를 주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시네
불빛 밝히면
더 아픈 거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내 마음이 소리치면
더더욱 죽을 듯이 아픈 거


정녕 이상하여라
안개 저편에서
누군가
헐거운 바람옷을 입으신 그분이
나를 일깨워 주시네
한번 태어난 목숨 결코
덧없지 아니하며
한번 태어난 사랑은
더욱더 그러하니라고

..............................................

 

한 줄 한 줄 놓칠 수 없는 구절과 단어들

시인의 치열함과 치밀함이 고스란히 찍혀있습니다.

 

아슴하니 가슴 한 구석 꽉 막혀오다가

다시 안개 저편에서 불 빛 밝히듯

가슴 한 구석 환하게 밝아옵니다.

 

'그러하다고...'

 

사랑의 마술입니다.

언어의 연금술입니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