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들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

노래를 불러보려 기타를 안는다.
몇 개의 노래 제목과 몇 마디의 멜로디가
바람결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지판 위에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댄다.
기다린다.


글을 써 보려 연필을 든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무수한 단어들과 심상의 조각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머릿속에
뒤죽박죽 뒤섞여있다.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흰 종이 위에 연필심을 댄다.


시작하기 전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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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비 내리고 - 편지 1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

사랑은 아프다.
사랑하니까 시리고 아프다.
사랑이려니 먹먹하고 시리고 아프다.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되기까지
인내하고 용서하고 다독여야하는 시간은
도대체 얼만큼인지


무엇 하나 지켜내기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도대체 얼만큼인지


사랑은 먹먹하다.
사랑하니까 시리고 먹먹하다.
사랑이려니 아프고 시리고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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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가고 
 

                 나희덕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의 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 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둥치 아래 허물 벗어두고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 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를 그대는 알아보겠지
.................................................

계절이 지나간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간다.

시간이 지나간다.
일분, 이분, 한시간, 두시간, 하루, 이틀, 일년, 십년...
어제가 가고, 오늘이 또 간다.

겨울이 지나가고 나면
봄이 오겠지.
오늘이 지나면
내일 오겠지.

그렇게 무심히 지나가는 것조차
자취를 남기는 법

비록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삶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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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호에서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

 

 

한 겨울 꽁꽁 얼어붙은 호수...
하지만 그냥 건너다니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란다.


얼어붙은 호수도 숨을 쉬어야 한단다.
그래서 숨구멍이 있단다.


강추위에 어깨 움츠리고...
그보다 더 차갑고 매서운 세상살이에 고개숙이고...


숨구멍이 찾아야 할텐데...
한숨이라도 뱉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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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 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그렇구나, 우리 산다는 게...^.^...


수직으로 꽂히거나
혹은 그걸 수평으로 막거나
사선으로 흐르니 차라리
그 속도라도 좀 조절이 되겠지...


늘 그렇듯, 싸우는 사람들보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이 더 힘들다.


창밖의 빗소리가 요란하고 치열하다.
여기 저기 홍수 피해가 났다는 소식도 들린다.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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