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오세영

 

나무가
꽃눈을 피운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찬란한 봄날 그 뒤안길에서
홀로 서 있던 수국
그러나 시방 수국은 시나브로
지고 있다.


찢어진 편지지처럼
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이 진다는 것은
기다림에 지친 나무가 마지막
연서를 띄운다는 것이다.


이 꽃잎 우표대신, 봉투에 부쳐 보내면
배달될수 있을까.
그리운 이여.
봄이 저무는 꽃 그늘 아래서
오늘은 이제 나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

유한함을 알기에 더 소중해진 하루
지는 꽃 잎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서둔다.


옥석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흔한가?
수시로 색이 변하는 저 나무며 숲이며
잃어버리고,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오면
그리하면 되는 것.


행여 시들까 염려하는 지금
근심하며 보내버리는 시간
아껴야 해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꽃 잎
딱 한 잎만
사랑이라 믿고
책장 사이 넣어두자.
오늘은 그리하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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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언젠가 수를 셀 때, 앞에서부터 세는 것이 빠른지 아니면 뒤에서부터 세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할지 헤어지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나와 이별하는 사람이 새롭게 만나는 사람보다 많아졌다는 걸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게 남은 날이 또 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을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내가 남기고 갈 것도, 가지고 갈 것도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지금의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하려면 많이 내려놓고, 비우고, 덜고 가는 게 맞다는 걸 알았다.


함께 가자고 마주 잡은 손을 언젠가는 놓아야 한다. 살다 보면 각자의 길을 갈 때가 온다.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친구, 선후배, 동료, 연인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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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영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
살얼음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가 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물 소리
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
........................................................

가언선행(嘉言善行)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동이다.


이는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좋은 사람들, 긍정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가까이하는 것이 좋다.


또, 기대를 갖고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관찰하고, 응원해 줘야 선행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 훈련하고 교육해서 습관을 들여야 한다.
욕도 자꾸하면 습관이 되는 것처럼 선행(善行)도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이기에 자신을 바르게 세워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을 인정하고 긍정하고 뒤돌아 볼 줄 알아야 남을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볼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오만이나 편견의 늪에 빠져있지 않은가를 항상 돌아보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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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지치거든


                                   오세영


그리움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들끓는 격정은 자고
지금은
평형을 지키는 불의 물
청자 다기에 고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구나
누가 사랑을 열병이라고 했던가


들뜬 꽃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마른 입술을 적시는 한 모금의 물
기다림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등꽃 푸른 그늘 아래 앉아
한 잔의 차를 들자

...................................................................

오늘도 비

이어지는 비에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고

 

오랜만에 차를 한 잔 해야겠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꺼내고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을 누린 것이 언제였지

한동안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지

 

여유로움은 어쩌면

무수한 번거로움이 주는

작은 혜택

 

오늘은 기어코 차 한 잔 마셔야겠다

 

이것 저것 꺼내고, 챙겨 놓고, 물을 끓이고, 차를 꺼내고, 찻잔을 닦고

채비를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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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장미가 함박 피어있었다.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은 나를 채근하느라 힘을 다 뺐다.
무기력해진 내가 더 맥없어 보일 때 쯤,
화려한 장미의 향연이 펼쳐져 있음을 그제서야 보았다.


하지만 그 화려한 향연도 끝날 때가 가까웠음을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았다.
탐스럽게 피었다 싶은 장미에 손을 대자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핏빛 꽃잎...


내 맘 속에 열정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가라앉혀야 할 때를 알게 된 것일게다.


다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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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꽃


                                오세영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멀리 있는 것은 별이 된다.
멀리 있으므로 기억이 흐린,
흐려서 윤곽이 선명치 않는 너의
이,
목,
구,
비,
강 건너 반짝이는 불빛, 혹은
대숲에 비끼는 노을 같은 것,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아름다운
안개꽃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흐르는 은하
한 줄기.
...................................................

 

멀리 있는 것은 별이 된다.
사랑은 안개꽃이다.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아름다운...


멋진 표현이지만 슬프다...
저 은하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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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에 
  
                     오세영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잎새 피어난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잎새 피면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 너를 만남으로써
슬픔을 알았노라.
전신에 번지는 이 초록의 그리움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의 그
꽃 그늘을,

............................................

 

눈부시게 빛나는 봄날의 화려함,

그 축제의 계절을 노래한 시는 많다.

이 시를 읽으면...

역시...

오세영 시인을 봄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하다...

   4월

 

                         오세영

 

언제 우뢰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

 

꽃의 시인, 자연의 시인 오세영님의 시입니다.

4월이 격정적인 것은, 열광적인 이유는 아마도

사방천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의 향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잔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시들어 지고, 흩어져 뿌려지는 꽃의 주검들...

그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이별...

하지만 4월이 공허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푸르러, 짙푸르러 우거져 숲을 이루는 綠蔭의

푸른 생명의 생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잎이 피고, 줄기가 굵어지며, 뿌리가 깊어져,

나무가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루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4월이 격정적인 것은, 열광적인 이유는

아마도 이제 곧 시작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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