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연가


                            이해인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다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서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

타고 난 생이 달라
가까이 할 수 없음을


행여 그 모습이라도 볼까 하여
향기라도 남아 있을까 하여
담벼락에 매달려 오르고 또 오르고


겨우 담 하나 넘는데 한 생을 다 보내고
꽃이라도 피었거늘


꿈에라도 찾던 이가
영영 가고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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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길을 간다


                            이해인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며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

생각해 보면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게 되는 게
우리의 일상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매일 매일이 새 날이니 말이죠.
하루를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혜안을 주십니다.
분별하고 조심하도록 말이지요.


조금만 귀 기울이고 집중하면
바람소리도, 빗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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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이해인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읍니다
당신 손 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읍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읍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4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5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6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7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8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9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 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 오는 가을 기슭엔
수 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없이 소리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

 

11
누구나 한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온 날을 고마와하며
떠날 채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12
낙엽 타는 밤마다
죽음이 향기로운 가을

당신을 위하여
연기로 피는 남은 생애
살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이 나에게
정다운 말을 건네는
가을엔 당신께 편지를 쓰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편지를 쓰겠습니다

 

26
깊은 밤, 홀로 깨어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
방 안에 가득한 탱자 향기의 고독.
가을은 나에게 청빈을 가르칩니다.
대나무 처럼 비우고 비워 더 맑게 울리는 내 영혼의 기도 한 자락.
가을은 나에게 순명을 가르칩니다.

 

27
가을이 파놓은 고독이란 우물가에서 물울 긷습니다.
두레박 없이도 그 맑은 물을 퍼 마시면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지난 여름 내 욕심의 숲에 가려 아니 보였던 당신 모습도 하나 가득 출렁여 오는 우물.
날마다 새로이 나를 키우는 하늘 빛 고독의 깊이를 나는 사랑합니다.

................................................................................................................................

감사합니다.

 

잔치같은 하루를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한방울 이슬을 마주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내 아이의 순결한 숨소리를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따사로운 햇살같은 가르침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의 향기 가득한 하루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오는 날의 일기


                    이해인

 

비 오는 날은
촛불을 밝히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습관적으로 내리면서도
습관적인 것을 거부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쓰고 싶던
사랑의 말도
부드럽고 영롱한 빗방울로
내 가슴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네


빨랫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 하나
사라지며 내게 속삭이네


혼자만의 기쁨
혼자만의 아픔은
소리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고
늘 잠잠히 있는 것이 제일 좋으니
건성으로 듣지 말고 명심하라고
떠나면서 일러주네


너무 목이 말라 죽어가던
우리의 산하
부스럼난 논바닥에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은 하얀 비가 내리네


어떠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산에 들에
가슴에 꽂히는 비


얇디얇은 옷을 입어
부끄러워하는 단비
차갑지만 사랑스런 그 뺨에
입맞추고 싶네


우리도 오늘은 비가 되자


사랑 없이 거칠고
용서 못해 갈라진
사나운 눈길 거두고
이 세상 어디든지
한 방울의 기쁨으로
한 줄기의 웃음으로
순하게 녹아내리는
하얀 비, 고운 비
맑은 비가 되자


집도
몸도
마음도
물에 젖어
무겁다


무거울수록
힘든 삶


죽어서도 젖고 싶진 않다고
나의 뼈는
처음으로 외친다


함께 있을 땐
무심히 보아 넘긴
한 줄기 햇볕을
이토록 어여쁜 그리움으로
노래하게 될 줄이야


내 몸과 마음을
퉁퉁 붓게 한 물기를 빼고
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뽀송뽀송 빛나는 마른 노래를
해 아래 부르고 싶다
......................................................

기나 긴 비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사나운 빗줄기에
시름마저 깊어져
자꾸만 젖어가는 어깨
자꾸만 되뇌어지는 상념들


눅눅해진 마음 한 곁에 촛불 밝혀 줄,
시름 한 잔 함께 기울일
따스한 햇살 같은 사람이
그리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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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사랑을 담아


                                       이해인


그대 그리움 한 잔에 커피 잔에 물을 따르는 순간부터
그대 향이 마음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커피를 유난히도 좋아한 그대의 그윽한 영상이
커피향 만큼이나 나의
온 몸을 감싸고 피어오릅니다


오늘의 커피에는 그대의 이름을 담았습니다
나의 목을 타고 흘러 가슴까지
퍼져오는 따스함은 그대를 향한 내 그리움입니다


그대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혼자만의 고백을
은은한 향으로 피워 올리며
그리움이 가라앉은 커피를 동그랗게
흔들어 마십니다


커피 한 잔에 그대 그리움 한 잔에
언젠가 만날 그 날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

티스푼이 놓인 커피 받침...

그리고 커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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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이해인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 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 일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 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

 

달콤한 치자꽃 향이 솔솔 풍기는 듯 합니다.
수녀님의 말처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2월의 엽서

 

                         이해인


또 한해가 가 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해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남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합니다.


같은 잘못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엔 없는 것처럼
시간을 아껴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로 행복할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할 것
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

언제부턴가 제가 올린 글을 읽어주시고

함께 아름다운 시를 공유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줄의 글이, 한 줄의 시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즐거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2009년 새해에는 좋은 일 기쁜 일만

많이 생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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