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길
 

                  정호승

 
제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방은 칠흑같은 어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텅 빈 공간의 고요
차가운 핸들에 엎드려
가슴치며 울었던
마치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샤워기 물소리,
북받치는 울음을 참는 구역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곁을 스쳐가는 차가 일으킨 바람소리...


어지러이 사방으로 번지던 소리가
커다란 배수구로 빨려 내려가듯 후룩!
일순간, 사라졌다.


흠뻑 젖은 차 창에 빼곡히 맺힌
눈물, 눈물, 눈물
창을 타고 빗줄기 한 줄기
주룩 흘러내릴 때,
동시에,
내 관자놀이를 타고
생살을 찢어낼 듯 예리하게
흘러내리는 싸늘한 땀방울


이 순간!

살아있다.

물안개 번지듯
봄 비 오시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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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이번 겨울은 왜 이리 추운거냐?


말도 안되는 섭씨 영하 15도, 영하 18도가 며칠 째 계속 된다.
한강 물도 다 얼었고,
10여일째 쌓인 눈은 그대로 얼어붙어 빙판이 되었다.
하기사 어디 얼어붙은 것이 날씨뿐인가?


경제도 얼어붙었고, 정치도 얼어붙었다.
사회도 얼어붙었고, 문화도 얼어붙었다.
시장도 얼어붙었고, 공장도 얼어붙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겨울나기 준비를 제대로 못한 탓이다.


겨울 오기 전에
이불 빨래도 미리 해 두고,
옷장 정리도 미리 해 뒀어야 했다.
쌀도 넉넉히 사 두고,
장작도 열심히 패서 쌓아 뒀어야 했다.
문틈도 막아 두고,
문짝도 단단히 달아뒀어야 했다.


이번 겨울은 왜 이리 추우냐고 할 일이 아니었다.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가끔은 시 한 편 읽어 보기도 만만치 않다.

여유란 가지려고 갖게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주어지지도 않는 듯 하다.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

그냥 '짬' 이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잠깐 짬을 내서 이 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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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

기다리는 일이 행복할 수 있을까?
기다리는 마음이 설렐 수 있을까?


누군가를 한 번도 애타게 기다려보지 않은 이가
기다리는 일조차 행복했던 이에게 편지를 쓴다.


무수히 되뇌던 이름이 이제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고...
수없이 그려보던 얼굴이 이젠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렇게 널 떠난다고...
그렇게 널 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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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게


                           정호승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내게 살아야 할 오늘이 주어졌다.
늘 감사하긴 참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은


내게 주어진 하루가
맑은 공기가
반가운 햇살이
모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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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꽃


                  정호승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던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황국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

몇 가지 번거로운 일을 겪고 나니
한순간에 보름이 지나버렸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에
어지럽게 낙엽이 흩어져 쌓이고 또 굴러가고...
길 가 여기저기 마른 나뭇가지도 부러져 떨어졌다.


어느 때부터인지 감각하지 못했던 시간, 그 속도...
만남과 헤어짐...
자꾸 예민해져가는 내 촉수가 반응한다.


입가에 맴도는 한 줄의 시
'언제나 나를 가르치는 건 시간...'


가을 바람이 싸늘하게 볼을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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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정호승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 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 속 깊이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모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스 잎새처럼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기를
더 이상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도 높게 높게 가지를 뻗어
별들이 쉬어가는 숲이 되기를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기를


나는 왜 당신의 가난한 의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의자에만 앉으려고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나는 왜 당신의 의자 한 번 고쳐주지 못하고
부서진 의자를 다시 부수고 말았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

낡은 의자의 기도


의자로 태어나 살 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잘 갖춘 모양새로 사랑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잠시 쉬어갈 곳이 됨을 감사합니다.
온전히 한 자리 지켜내게 함을 감사합니다.
그들을 무릎을 굽혀 똑바로 앉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마주 하기 무섭게 등 돌리고 돌아앉은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심에 감사합니다.
발 뻗고 기대앉은 자들의 무례함을 받아주심을 또한 감사합니다.
가끔 나를 밀치고 넘어뜨려도 모두 잘 인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비록 낡고 부서져 더 이상 쓸모없어지더라도
아무런 후회 남지 않음을 또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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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오면 빗 길을 걸어라.
갈대숲에 검은 가슴 도요새도 너를 보고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무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을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거리에 인적도 드물어진 시간,
가슴이 먹먹해져 밖으로 나왔다.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그 비를 다 맞고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으며, 또 얼마나 걸어야 할까...
어디까지 가야하며, 왜 걷고 있는가...


울지마라...

그래, 외로우니까 사람이지.
사람이니까 외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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