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들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

노래를 불러보려 기타를 안는다.
몇 개의 노래 제목과 몇 마디의 멜로디가
바람결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지판 위에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댄다.
기다린다.


글을 써 보려 연필을 든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무수한 단어들과 심상의 조각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머릿속에
뒤죽박죽 뒤섞여있다.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흰 종이 위에 연필심을 댄다.


시작하기 전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명시 감상 6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선우... 간이역   (0) 2014.07.04
이해인... 능소화 연가  (0) 2014.06.24
백석... 비  (0) 2014.06.03
신용목... 우물  (0) 2014.06.03
한하운... 무지개  (0) 2014.04.21

벗어놓은 스타킹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히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그라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 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 벗어 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 들고 일어나 물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 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

입김도 서릿발처럼 엉겨붙을 것 같은 날
하늘은 그리움 한 조각 찾을 것도 없이
시리도록 푸르다.


텅 빈 하늘 그 공간에
어떤 것도 덧칠되어 있지 않아서 시리다.


아까부터 시려오던 볼은
까마득히 지나쳐
이미 얼어붙은 어느 시간
마룻턱에서 술취한 아비에게
고막이 터지도록 맞은 따귀 때문이었고,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오는 귓바퀴는
지금 저 하늘처럼 푸르던 어느 날
살벌한 한기가 뼛속까지 저미던 겨울 밤
박박머리의 청년이
발가벗겨진 채로 연병장을 굴렀던 때문이었다.


어느 새
낙엽이 한 두께 쌓인 바닥을 걷어 보면
한 생애 푸르렀던 것들 모두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것이다.


오늘은 버석거리는 낙엽들을 한 자루 긁어 모아
마음껏 태워 볼 양이다.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사인... 깊이 묻다  (0) 2012.11.28
김영랑... 망각  (0) 2012.11.21
이상국... 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0) 2012.11.05
이상국... 집은 아직 따뜻하다   (0) 2012.11.02
오규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0) 2012.11.01

찬비 내리고 - 편지 1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

사랑은 아프다.
사랑하니까 시리고 아프다.
사랑이려니 먹먹하고 시리고 아프다.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되기까지
인내하고 용서하고 다독여야하는 시간은
도대체 얼만큼인지


무엇 하나 지켜내기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도대체 얼만큼인지


사랑은 먹먹하다.
사랑하니까 시리고 먹먹하다.
사랑이려니 아프고 시리고 먹먹하다.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형도... 엄마걱정  (0) 2012.10.04
고두현... 보고 싶은 마음  (0) 2012.10.04
정경혜... 저 빈 마음 속 바람  (0) 2012.09.19
이동순... 서흥 김씨 내간  (0) 2012.09.10
이수익... 그리고 너를 위하여  (0) 2012.09.06

여름은 가고 
 

                 나희덕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의 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 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둥치 아래 허물 벗어두고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 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를 그대는 알아보겠지
.................................................

계절이 지나간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간다.

시간이 지나간다.
일분, 이분, 한시간, 두시간, 하루, 이틀, 일년, 십년...
어제가 가고, 오늘이 또 간다.

겨울이 지나가고 나면
봄이 오겠지.
오늘이 지나면
내일 오겠지.

그렇게 무심히 지나가는 것조차
자취를 남기는 법

비록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삶이라 해도...

'명시 감상 4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광규... 아내  (0) 2011.10.20
이종문... 아내의 독립선언  (0) 2011.10.17
김민정... 마음 한 장  (0) 2011.10.06
정호승... 또 기다리는 편지   (0) 2011.09.30
공석진... 갈대꽃  (0) 2011.09.23

 천장호에서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

 

 

한 겨울 꽁꽁 얼어붙은 호수...
하지만 그냥 건너다니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란다.


얼어붙은 호수도 숨을 쉬어야 한단다.
그래서 숨구멍이 있단다.


강추위에 어깨 움츠리고...
그보다 더 차갑고 매서운 세상살이에 고개숙이고...


숨구멍이 찾아야 할텐데...
한숨이라도 뱉어야 할텐데...

'명시 감상 2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재진... 따뜻한 그리움   (0) 2010.03.03
이생진... 도선사  (0) 2010.02.19
유안진... 겨울사랑  (0) 2010.02.19
김강태... 돌아오는 길  (0) 2010.02.09
곽재구...사평역(沙平驛)에서   (0) 2010.02.04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 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그렇구나, 우리 산다는 게...^.^...


수직으로 꽂히거나
혹은 그걸 수평으로 막거나
사선으로 흐르니 차라리
그 속도라도 좀 조절이 되겠지...


늘 그렇듯, 싸우는 사람들보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이 더 힘들다.


창밖의 빗소리가 요란하고 치열하다.
여기 저기 홍수 피해가 났다는 소식도 들린다.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명시 감상 2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광일... 복숭아   (0) 2009.07.21
손택수... 거미줄  (0) 2009.07.16
손택수...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0) 2009.07.08
박재삼... 사랑의 노래  (0) 2009.07.08
원태연...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0) 2009.07.03

   11월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

 

어느덧 11월이 다 지나갔다.

이제 한 해를 접어둘 시간,

자주 보자던 약속도 한 번 꺼내보지 못하고

서랍 한 구석에 넣어 둔다.

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볼 수 있으려나?

겨우내 기다리다 행여 변하지 않으려나?

힘든 계절,

어려운 시절이 다시 오고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또 그럭저럭 지나가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귀뚜라미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는,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다면

나 아직 여기 살아있음을...


그 고귀한 작은 진리 하나 찾지 못하고,

내 울음은

누구의 마음을 텅 비게 하고

또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누구의 마음을 닫게 하고...


내 울음이 노래가 되고,
언젠가 누군가의 가슴에 울릴 수 있을까?
그것조차 욕심일까?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용선... 갈대, 억새 (두 편)  (0) 2008.10.21
김남조... 편지  (0) 2008.10.07
황지우...늙어가는 아내에게  (0) 2008.09.29
강은교... 사랑법  (0) 2008.09.29
용혜원...가을을 파는 꽃집  (0) 2008.09.25

+ Recent posts